장석광
장석광

끝없이 펼쳐진 시베리아 설원을 달리는 증기기관차, 창백한 겨울 태양 아래 은빛으로 빛나는 자작나무, 얼음 궁전의 유리창 성에가 그린 기하학적 무늬, 별장 정원에 흐드러지게 핀 노란 수선화, 짙은 눈썹에 강렬하면서도 우수어린 지바고의 그윽한 눈빛, 비련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기에 더욱 애절한 라라의 잿빛 눈동자, 발랄라이카의 가슴을 저미는 듯 애수어린 선율... <닥터 지바고>는 한 폭의 수채화로, 절절한 눈빛으로, 감미로운 음악으로 기억되고 있다.

CIA 본부에는 요원들에게만 공개되는 비밀 박물관이 있다. 에니그마 암호화 기계, 반(半)잠수정, 잠자리 위장 무인기, 빈 라덴의 AK-47 소총... 70여 년 비밀스러운 CIA 공작 역사가 오롯이 전시되어 있는 가운데 포켓용 소책자 두 권이 뜬금없다. 가로 3.5인치, 세로 5.5인치, 두께 0.75인치 페이퍼백.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 1959년 프랑스에서 인쇄되었다는 문구가 러시아어로 표기되어 있다. <닥터 지바고>는 왜 CIA 비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을까?

1958년 1월, CIA 본부에 영국 MI6가 보낸 필름 두 통이 도착했다. 소련에서 출판이 금지된 <닥터 지바고> 원고를 촬영한 필름이었다. 전문가들은 이 소설이 ‘국가에 대한 정치적 충성에 관계없이 인간은 누구나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는 인본주의적 메시지를 전한다’고 분석했다. 앨런 덜레스 CIA 국장은 심리전의 좋은 소재임을 직감했다.

마침 1958년 4월부터 9월까지 벨기에 브뤼셀에서 세계박람회가 개최될 예정이었다. 1만6,000명의 소련 관광객들이 벨기에로부터 비자까지 발급받은 상태였다. CIA로선 절호의 기회였다. 9월 초, 네덜란드 정보기관(BVD)의 협조를 받아 헤이그 ‘무튼’ 출판사에서 최초의 러시아어판 <닥터 지바고>를 전격 출판했다. 책은 즉시 벨기에로 옮겨졌고, 귀국을 앞둔 소련 관광객들 손에 곧바로 배포되었다. 일부 관광객은 책을 쉽게 숨기기 위해 표지를 뜯고 페이지를 나누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10월 중순, 러시아 소설의 전통을 계승했다는 공로로 파스테르나크의 노벨상 수상이 발표되었다. 노벨상을 받으려면 자국어 원작의 출판이 있어야 한다는 수상위원회의 장애물을 CIA가 해결해 준 덕분이었다. 1959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세계청년학생축전이 개최되었다. CIA는 책을 쉽게 숨길 수 있도록 사이즈를 줄이고 두 권으로 나눴다. CIA 비밀 박물관에 전시된 포켓용 페이퍼백 두 권은 이때 만들어진 책이다.

소련은 파스테르나크를 압박해 노벨상 수상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미국에 고용된 문학적 창녀’라고 비난도 서슴지 않았다. 그럴수록 <닥터 지바고>는 뉴욕타임즈 베스터셀러 1위에 연속으로 올랐고, 모스크바 암시장에서는 노동자 일주일치 임금에 거래되었다. 소련 시민들은 정부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국제사회에서 소련의 위상은 추락했다. 전 세계적으로 수백만 권의 책이 팔렸고, 1965년에는 영화로도 만들어져 그해 아카데미상을 5개나 수상했다.

소련에서는 1988년이 되어서야 <닥터 지바고>가 출판되었다. 3년 후 소련이 무너졌다. 스탈린은 ‘영혼의 생산은 탱크의 생산보다 더 중요하다’며 문학의 강력한 정치성을 믿었다. 작가는 ‘영혼을 조종하는 기술자’라고까지 묘사했다. 냉전시대, 천만 권에 달하는 책과 잡지가 문화공작의 일환으로 CIA에 의해 철의 장막 뒤로 은밀히 배포되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다.

데이터 수집, 사이버 감시, 무인항공기에 집착하는 것이 요즘 정보기관의 대세라고는 하지만, 소프트파워를 찾아내고 지원하는 것도 한번쯤 고려해 볼 만한 전략이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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