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납북자 10만 여명··· 세 부류로 나눠 北送작전
6.25 납북자 10만 여명··· 세 부류로 나눠 北送작전
  • 유진
  • 승인 2018.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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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 서울 수복 직전 200~300명 씩 무리지어 북조선 인민군에게 끌려가는 민간인들. 출처=6.25전쟁 납북인사가족협의회
1950년 9월 서울 수복 직전 200~300명 씩 무리지어 북조선 인민군에게 끌려가는 민간인들. 출처=6.25전쟁 납북인사가족협의회
  <21>‘요인 북송작전’으로 우익계 우수 인적자원 납북

다음으로 북한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김일성과 북한지도부가 감행한 주요 공작의 하나는 우익계 인사들을 회유, 협박, 체포해 강제 입북시키는 것이었다. 아울러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게 수준 높고 능력 있는 과학자, 기술자들과 경제, 문화, 교육계 인사 등 각계에서 활동하고 있던 남한의 우수한 인적자원들을 북한으로 약탈하는 작업도 추진되었다. 물론 남로당계 인사나 좌익계 인물들은 대부분 스스로 퇴각하는 북한군을 따라나섰기 때문에 강제 입북시킬 필요가 없었다.

이를 위해 김일성은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뒤 곧바로 "해방된 남조선에서 정치, 경제, 교육, 문화, 과학 분야의 주요 인사들을 포섭하고 재교양하여 그들과의 통일전선을 강화할 데 대하여"라는 노동당 결정서를 채택하였다.

북한이 노동당 결정서를 채택하고 남한의 인적 자원 약탈에 나선 것은 유능한 인적 자원들을 확보해 자신들의 취약한 정치 경제적 기반을 강화하는 동시에 김일성 정권이 남과 북을 모두 대표하는 통일정부,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라는 점을 강조해 정통성을 확보하려는데 있었다.

이와 함께 북한군의 무력남침을 '조국해방전쟁'으로 둔갑시키고 동족상잔을 정당화하는데 있어서도 중요했기 때문이다. 물론 북한의 요구에 불응해 북송을 거부하거나 불만을 표출하는 인사들에 대해서는 반동으로 몰아 숙청 제거해 반대세력을 약화시켰다.

6.25 때 납북된 인사들을 풀어 달라는 거리 시위. 1954년 3월 11일 덕수궁 앞이다. 출처=6.25납북인사가족
6.25 때 납북된 인사들을 풀어 달라는 거리 시위. 1954년 3월 11일 덕수궁 앞이다. 출처=6.25전쟁 납북인사가족협의회

◇요인 북송 전담 조직 만들어

북한은 노동당 결정서 발표 이후 그것을 집행하려는 전담조직을 만들었다. 말하자면 '요인북송 공작조직'인 셈이다. 그러나 그들 내부에서는 ‘모시기 공작’또는 ‘모시기 작전’으로 명명했다. 이와 함께 ‘모시기 공작’은 북한 내무성 정보국이 주도하고 중앙당 해당 실무부서와 서울 현지지도부가 협조했다. 여기에 조국전선 중앙위원회를 참여시키기로 했다.

이에 따라 조직된 ‘요인 모시기 공작’전담조직은 당시 내무성 부상 겸 정보국장으로서 서울 현지지도부 성원으로 임명되어 서울에 나와 있던 방학세를 책임자로 하고 정보국 부국장들인 김창수와 김춘삼이 부책임자로 구성되었다.

김관섭, 최종희, 김철, 김병찬 등은 모시기 공작 전담조직 성원으로 임명했다. 이 외에도 국회프락치 사건 관련자들, 남로당원들, 민청원 및 협조자들이 전담조직에 포함되었다. 물론 방학세 부상 겸 정보국장의 지휘를 받는 북한 내무성 소속의 내무원들은 행동대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요인 모시기 공작 전담조직은 내무성 정보국장 방학세의 지휘 하에 먼저 북한으로 끌고 가거나 제거할 인물들의 명단을 작성하고 이들을 분류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말하자면 명망 있는 정치인으로부터 이름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북한에 꼭 필요한 인물들까지 포함해 모든 북송대상 명단과 제거대상 명단을 구체적으로 작성하고 그들을 평가해 북한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인물,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인물, 북한을 반대하는 자 등으로 분류하고 이들을 각각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했다.

◇北적극지지자, 중도, 반대자로 분류해 북송

이를테면 북한정권 수립에 참여했던 남한의 정당ㆍ단체 소속 인물, 북한의 지령에 따라 국회를 비롯한 한국의 정당ㆍ단체에 잠입해 활동했던 인물 및 동정자, 1948년 4월 평양에서 진행된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했던 정당ㆍ단체 소속 인사들을 '적극적 지지자'로 분류하였다.

그리고 적극적인 지지자로 분류된 대상들에 대해서는 서울현지에서 협조할 대상, 평양으로 데려가 활용할 대상, 평양에서 3개월 간 세뇌교육을 실시하고 돌려보낼 대상 등으로 재분류하였다.

또한 적극적인 지지자는 아니지만 자진 출두해 북한에 협력하겠다고 나오는 인사들, 강제연행 또는 체포되었으나 북한에 협력하겠다는 인사들에 대해서는 중도적 성향의 인물로 분류하고 이들 역시 귀가시키거나 현지에서 협조할 대

납북자 송환 촉구 유엔 청원을 위한 백만인 서명운동에 참가한 시민들. 1954년 6월 25일 촬영. 출처=
납북자 송환 촉구 유엔 청원을 위한 백만인 서명운동에 참가한 시민들. 1954년 6월 25일 촬영. 출처=6.25전쟁 납북인사가족협의회

상, 평양으로 보내 세뇌시킬 대상 등으로 재분류했다.

그리고 강제연행 및 체포된 인사 가운데 북한에 대한 협력을 거부하고 반대 입장을 취하는 대상에 대해서는 평양으로 끌고 가 감금할 대상, 서울현지에 구금할 대상 등으로 재분류했다.

한편, 요인 모시기 전담조직에서는 신문이나 포스터에 주요 인사들의 자진출두 및 자수를 권고하는 공고문을 발표했다. 특히 대한민국 정부에 충성하거나 협조했던 인물들에게 자수를 권고한 것이 주목된다. 예를 들면 '국회의원 ◯◯◯가 자수하여 따뜻한 보호를 받고 있으니 피신하고 있는 사람들도 하루빨리 자수해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바란다'는 내용으로 공고를 발표한 것이다.

◇납북 연락사무소 ‘성남호텔’

물론 자수대상들이 찾아올 사무소 위치와 시간에 대해서도 알려주었다. 당시 자수자들에게 공고했던 연락사무소는 서울 중구 다동에 있던 '성남호텔'이었다. 이 호텔은 요인 모시기 전담조직이 사무실로 쓰고 있었다.

이와 함께 모시기 공작 전담조직은 북송할 요인들의 소재를 파악하는 작업과 함께 자수하지 않는 인사들을 연행, 체포하기 위해 서울 시내는 물론 각 도시와 농촌에 산재해 있는 북송대상들의 집과 연고관계자들의 거주지까지 방문 수색했다.

이러한 계획 하에 요인 모시기 공작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던 북한은 미국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어쩔 수 없이 서울에서 갑자기 퇴각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심사를 위해 집결시켰던 인사들을 그들의 개별적인 의사와는 관계없이 전원 강제 입북시켰던 것이다. 말 그대로 남한의 인적 자원 약탈인 셈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북한이 모시기 공작을 시작할 때는 자신들에게 꼭 필요한 몇몇 인사를 제외하고는 많은 남한사람들을 무작정 강제 입북시킬 생각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교양이 필요한 일부 인원을 평양에 데리고 가서 일정기간 사상교육을 시킨 다음 원래 생활하던 곳으로 돌려보내려고 계획했던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6.25전쟁을 일으킨 다음 짧은 기간 내에 한국군을 낙동강계선까지 밀고 내려갔고, 따라서 자신들이 전쟁에서 당연히 승리할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들도 미처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급작스럽게 퇴각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것저것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무작정 집결시켜 놓았던 인원들을 데리고 북한으로 향했던 것이다.

인민군에게 이끌려 가는 납북자들. 출처=
인민군에게 이끌려 가는 납북자들. 출처=6.25전쟁 납북인사가족협의회

남한인사 강제 입북은 북한군 병사들의 인솔 아래 서울에서 평양까지는 군용트럭으로 이동했다. 북한지도부가 평양에서 퇴각할 때에는 그들을 따라 압록강변의 강계와 만포, 혜산까지 거의 도보로 끌려가야 했다. 이 과정에 비행기 폭격과 북한군의 학대 및 불법 사살 등으로 많은 납북인사들이 희생되었다.

이렇게 북한의 강제 납북으로 수많은 남한의 우수한 인재들이 북한으로 끌려갔다. 그 가운데는 김규식, 조소앙과 같은 임정요인들과 제헌국회의원들을 비롯한 유명 정치인들은 물론 경제계와 학계, 언론, 출판, 교육, 과학, 문화, 예술 등 다양한 분야의 인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무용가 최승희, 시인 정지용, 소설가 이광수·박태원 등 납북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전설적인 무용가 최승희와 시인 정지용, 소설가 이광수와 박태원 등 이름 있는 예술가와 문인들도 6.25전쟁 당시 북한에 빼앗긴 남한의 우수한 인적 자원이다.

당시 북한에 빼앗긴 인재들 가운데는 북한에서 누에박사 계응상, 나무박사 임록재, 새(鳥)박사 원홍구와 함께 김일성이 생전에 가장 아꼈던 4명의 과학자 중 한 사람인 '비날론 발명가' 이승기박사도 있다.

'비날론 발명가'로 유명한 이승기박사(1905~1996) 역시 6.25전쟁의 와중에 북한으로 끌려간 과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비날론'은 북한에서 '주체섬유'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전남 담양 출신의 이승기박사는 일제시대 일본으로 건너가 1931년 교토대학(공학부)을 졸업한 후 다카스키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공학박사 과정을 밟았다. 1939년에 당시 일본에서 가장 유명했던 사쿠라다 교수의 지도를 받으면서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는데, 그의 박사학위 논문이 바로 일본에서도 '합성섬유 1호'라 불리는 '비날론' 발명에 관한 내용이었다. 이승기박사는 석회석을 구워 만든 카바이드에서 '비날론'이라는 화학섬유를 세계최초로 얻어내는데 성공한 세계적인 화학자, 발명가였다.

1954년 3월 11일 서울 덕수궁 앞에서 납북자 송화 촉구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출처=6.25전쟁 납북인사가족협의회
1954년 3월 11일 서울 덕수궁 앞에서 납북자 송화 촉구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출처=6.25전쟁 납북인사가족협의회

◇요인 모시기 공작에 넘어간 '비날론 박사' 이승기

8.15광복 이후 귀국한 이승기박사는 서울대학교에서 공대학장으로 근무하면서 과학을 연구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다 북한의 요인 모시기 공작 대상으로 선정되어 가족과 함께 북한으로 들어갔다. 월북 이후인 1952년 북한 과학원 화학연구소장에 임명되었고 1956년에는 북한에서 가장 높은 학위인 원사가 되었다.

특히 김일성은 이승기박사가 월북한 이후 그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1961년 함흥에 2.8비날론공장을 건설했다. 비날론공장 건설이 끝난 다음에는 핵무기와 화학무기 연구에 종사하도록 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일은 이승기박사가 사망한 후 국장(國葬)으로 장례를 치르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북한이 6.25전쟁 시기에 약탈한 남한의 인적 자원 즉 전시납북자는 약 1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중 국가에 의해 공식적으로 전시납북자로 인정된 인원이 4777명이며, 1950년 12월 서울 수복 직후 대한민국 공보처 통계국이 작성한 납북자 관련 최초의 명부에 수록된 서울지역 납치자만 2400여명에 이르고 있다.

yj@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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