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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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역사학자 스펭글러 (Oswald Spengler)는 역사 속에서 사멸되지 않고 현존하는 8개의 문명권으로 이집트, 바벨론, 인도, 중국, 그리스와 로마, 아라비아, 멕시코, 유럽 등을 곱아 이들의 독자적 문화영역을 강조했다. 스펭글러가 주장하는 역사상대주의 이론의 핵심은 유럽 위주의 획일화된 세계사적 개념을 부정하고, 유럽사를 지역역사로만 규정했다는 것이다. 그는 급기야 문명의 사이클 속에서 유럽문명이 2400년 정도에 몰락할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역사상대주의가 종족적 민족주의와 결탁할 경우, 가장 위험한 폐쇄적 도그마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상대주의적 종족관념 속에는 그 어떤 포용과 관용, 성찰하는 문명적 요인은 없고, 배타적이며 편파적인 독특한 자기이해와 자기세계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중국은 스스로 세계 4대 문명권이라는 자부심과 오랫동안 아시아대륙을 지배해 왔다는 한족 중심의 천하질서에 완전히 매도되어 있다. 중국은 미-소 냉전시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이 내민 손을 잡았다. 그 덕에 산업화에 성공해 세계의 공장이란 칭호도 듣고 있다. 서구가 주도하는 문명의 도움으로 아시아적 야만에서 벗어난 중국은, 겉으로는 국제규범을 준수하는 국제사회의 중요한 일원이 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서구에 대한 중국의 문화상대주의의 벽은 한마디로 타협불가다. 서구적 합리주의와 경험주의를 배척하고 중국의 역사전통에 입각한 중화질서, 즉 천하질서를 노골적으로 고집하는 중화종족주의 아집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 정권 5년은 중국의 천하질서를 신봉하고 중국의 속국이기를 자청했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해양세력과의 연대보다는 대륙으로의 연대를 외교정책 목표로 삼고 있다. 대한민국은 구한말로부터 이어져오는, 한반도를 둘러싼 대륙세력과 해양세력간의 문명사적 대결관계를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을 망각하고 경제는 중국, 안보는 미국이라는 피상적인 외교적 선택을 할 경우 국가생존이 위태로울 수 있다. 새롭게 짜여진 윤석열 외교안보팀은 이 점을 각별히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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