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베 수교 30주년에 살펴본 베트남 역사-문화

한자문화권 다른 나라들과 차별되는 면모 보여
수교 30주년 기념 문화축제 열려...K-문화 홍보

한국-베트남 수교 30주년 기념 문화축제 포스터.
한국-베트남 수교 30주년 기념 문화축제 포스터.
 
베트남의 지정학. 중국과 숙명적 대결 구도가 있으며 남북의 역사적 이질성으로 국가통합이 쉽지 않은 이유다.

금년은 한국-베트남 수교 30주년이다. 16~17일 베트남에서 기념 문화축제가 열렸다(주 베트남 한국대사관·한국문화원 주최, 하노이한인회·한국관광공사·한국콘텐츠진흥원·한국저작권위원회·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 등 참가·협찬).

박노완 대사와 베트남 외교부·문체부 관계자들이 참석해 기념 현판 제막식을 시작으로, K팝 보컬 및 댄스 경연대회, 밴드 공연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었다. 주 무대는 현지 주민들에게 사진 촬영 명소로 떠오른 한국대사관 담장 주변이다. 음식·한복·관광·전통공예 등 한국문화와 관련된 각종 체험 프로그램과 한국 중소기업제품 홍보 행사도 펼쳐졌다.

1975년 4월 30일 사이공(현 하노이) 함락과 더불어 단절된 양국 관계는 1992년 12월 재개됐다. 흔히 베트남에 대해, 세계 최고의 강대국들(중국 프랑스 미국)을 물리치고 독립을 쟁취한 점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더 주목해야 할 부분은 과거사나 피해의식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베트남 전쟁 종식 20 여년만에 미국·한국 등 ‘원수졌던’ 나라들과 수교했다. 국익을 위해, 미래를 위해서다. 이런 합리성이 어디서 오는지 살피고 연구해야 할 것이다. 추천할 만한 참고서로 <베트남 근현대사>(최병욱, 2008)가 있다.

베트남은 고대 이래 반중(反中)정서가 뿌리 깊다. 오늘날 미·중 대결 시대에 유리한 측면이다. 베트남은 10세기 이래 500년간 꾸준히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조선이 500년간 폐쇄성을 유지하며 ‘단일 운명체’ 의식을 키우는 사이, 베트남은 인종적·문화적으로 이질적인 상대들을 융합시키려 한 셈이다.

우리나라 영·호남 이상으로 베트남의 북·중·남부 저마다 개성이 강하다. 19세기 초 최초의 전국적 통일왕조이자 마지막 왕조인 응우옌 왕조(1802~1945)가 성립한다(국호 ‘비엣남越南’). 응우옌 왕조가 프랑스 식민지배로 편입되기 시작한 게 1859년이니, 근대 이전 통일국가의 경험이 겨우 57년이다.

흥미로운 점은 한자문화권 다른 나라들과 차별되는 베트남의 면모들이다. 유교국가이면서 중화질서에 완전히 속하진 않았다(‘황제’를 칭하고 독자적인 ‘연호’사용) 1820년 응우옌 왕조 제2대 민망(明命)황제 이래 매년 대규모 선단(船團)을 해외로 파견한 것도 특이하다. 임무는 크게 중국 광동으로 가는 ‘여동(如東)공무’, 베트남 아래 땅과 관련된 ‘하주(下洲)공무’였다(말레이반도 및 자바·필리핀 등). 원거리 항해를 통해 수군 조련 및 바닷길 습득, 궁중 소비재부터 각종 선진 군수물자에 이르는 물자구매, 기술습득 등이 하주공무의 목적이었다. 과거 급제자 출신의 관료들이 몇개월씩 해외를 시찰하고 작성한 보고서가 정책입안에 적극 활용됐다.

기독교 전래의 역사 또한 한반도와 대비된다. 인간중심적이며 과학적인 유학을 숭상한 베트남의 전통 지식인들은 기독교 교리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반면 ‘관념론’의 극치인 성리학에 익숙한 조선의 선비들은 우주의 근원이자 운행법칙인 ‘도道’ 자리에 ‘하느님’을 대입시키면 됐다. 근대 일본을 보는 시각은 어땠을까. 메이지유신 및 러일전쟁 승리를 보며 기대를 가졌으나 얼마 안 가 일본의 침략성을 깨닫는다. 한일합병이 계기였고, 만주사변·중일전쟁을 거치면서 이 확신은 강화됐다. 1940년 일본군이 베트남에 진주했을 때, 새로운 정복자에 대한 두려움과 서양세력을 물리친 실력에 대한 경외심이 혼재한 동남아시아에서 베트남은 예외였다.

일본군에 대한 베트남인들의 ‘착잡한 궁금증’은 ‘쌀전쟁’을 거쳐 급속도로 증폭된다. 일본군의 쌀 징발→농민의 저항→아사자 발생(약 200만)→농민들의 베트민(越盟)참여→1945년 9월 ‘베트남 독립혁명선언’에 이르기까지, ‘쌀’을 둘러싼 갈등이 있었다.

농민들은 북베트남의 베트민에게서 구원을 찾는다. 1945년 4월 바오 다이 황제를 추대한 입헌군주제를 채택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베트민 측이 퇴위를 요구하자 황제는 순순히 동의했다(‘8월 혁명’). 같은 해 9월 1일 하노이에서 호치민의 ‘베트남민주공화국’, 10년 후 남부엔 베트남공화국(1955~75)이 성립한다.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1946-54)으로 프랑스를 몰아낸 후,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일명 ‘베트남전쟁’)을 치른다. 그것이 ‘승리한 민족해방전쟁’이었는지, ‘시장경제의 길을 늦춘 역사’였는지, 논할 때가 올 것이다.

'베트남 근현대사' 표지.
'베트남 근현대사'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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