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등소평도 따라한 박정희의 경제 정책
중국의 등소평도 따라한 박정희의 경제 정책
  • 최성재
  • 승인 2018.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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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제철 기공식에서의 박정희 대통령.
포항제철 기공식에서의 박정희 대통령.
 칼럼= 5·16의 세계사적 의의(下)/ 최성재 교육 문화 평론가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독재자에겐 공통적인 3대 과업이 있었다.

첫째, 철강업! 둘째, 고속도로! 셋째, 독재자의 동상!

북한의 독재자 김일성과 그의 아들 김정일 동상. 우상 숭배의 전형이다.
북한의 독재자 김일성과 그의 아들 김정일 동상. 우상 숭배의 전형이다.

이 중에서 성공한 것은 독재자의 동상 건립밖에 없다. 그것이 결과로 드러난 독재자의 참모습이다. 입만 떼면 독재자라고 오늘날까지 대한민국의 대부분 지식인(경제개발을 인정하는 우파 포함)이 박정희를 매도하지만, 박정희는 자신의 동상을 단 한 개도 안 세웠다.

대신에 세계 제일의 철강업을 일으켰다. 인구가 1억이 안 되는 후진국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철강업을 자본도, 기술도, 자원도 없이 일으켰다. 인구 8억에 자본과 자원도 무한정 동원할 수 있었던 공산 황제 모택동도 못했던 철강업을 일으켰다.

일본도 반대하고 독일도 반대하고 미국도 반대하고 UN도 반대하고 세계은행도 반대하고 IMF도 반대했지만, 나라가 망한다고 국내 지식인도 목에 피가 나도록 반대했지만, 도끼를 이마에 두세 개씩 묶고 이고 다니며 반대했지만, 대한민국이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던 일본과 독일과 미국을 능가하는 철강업의 기초를 확고하게 다져놓았다. 누가? 소련군 대위가 아니라 대한민국 육군 소장이! 그와 더불어 수줍음 잘 탔던 선글라스는 조선업과 자동차산업의 기반도 확실하게 닦았다.

국산 승용차 포니가 생산되고 있는 현대자동차 공장 생산라인.
1976년 한국 최초의 국산 국산 승용차 포니가 생산되고 있는 현대자동차 공장 양산라인.

게다가 박정희는 전국의 차량이 10만 대밖에 안 될 때, 1000만 대가 다닐 고속도로를 자력으로 건설하여 전국을 일일 생활권으로 만들었다. 물류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였다.

반면에 일제시대의 도로와 일제시대의 철강업을 우려먹으며 자신의 동상만 방방곡곡에 1500년 동안 조상들이 금수강산에 세운 불상보다 많이, 그 어떤 것보다 거대하게, 은진미륵불이 의기소침하게, 거대하게, 찬란하게 세운 자가 김일성이다.

박정희의 생일은 5천만 중에 휴대폰 검색하지 않고 기억하는 사람이 50명이나 될까 말까 하겠지만, 물론 나도 모른다만, 김일성 생일은 북한의 코흘리개도 자기 생일보다 더 잘 안다. 사탕이 나오니까! 다시 말해 도덕과 달리 정치는 결과인데, 이 결과로써 김일성의 마음과 박정희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것이다. 헤아려야 한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설명회.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설명회.

[올바른 선택, 잘못된 선택]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스탈린이 제일 먼저 시작했다(1928년). 두 번째는 1951년 네루, 그 다음으로 1953년 모택동, 1957년 김일성(3개년 계획부터 따지면 1954년) 등이 스탈린을 대동소이하게 모방했다.

1962년 박정희는 비상대권을 쥔 지 1년도 안 돼, 제1차 경제개발계획을 힘차게 밀고 나갔다. 이들 다섯 가운데 성공한 나라는 대한민국뿐이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출발점이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박정희만 시장 친화적인 방법으로 추진했고 나머지는 사회주의 이념에 맞춰 경제논리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정책이 놀라운 것은 그 당시 국내외의 주류든 비주류든 경제학자를 따르지 않고 한국 실정에 맞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기념 우표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기념 우표

아담 스미스의 시장경제를 옹호하는 다수의 서구 경제학자와 정치인은 비교우위(comparative advantage)의 원칙을 금과옥조로 확신하고 후진국에게 진심으로 충고했다. 경쟁력 있는 농산물이나 수산물, 지하자원이나 팔고 나머지는 몽땅 수입하라는 것이었다. 자유무역을 절대시했다. 후진국을 영원히 후진국으로 고착시키려는 못된 수작이었다.

케인즈의 사회적 시장경제 또는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경제를 옹호하는 다른 한편의 서구 또는 소련과 동구의 현자(賢者)들은 항구를 봉쇄하고 스스로 공업을 일으키고 상업을 통제하라고 진심으로 충고했다. 보호무역을 적극 옹호했다. 한마디로 수입대체(import substitution) 정책을 추구해야 자본주의 제국으로부터 실질적인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뱀의 속삭임이었다.

중남미도 인도도 이런 정책을 추구하다가 결국 다 망해 버렸다. 국제 경쟁력이 전혀 없는 부패한 독점 기업을 양산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이 둘 중 어느 것도 따르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도 식민지 지배의 아픔을 겪은 인도의 네루가 그러했듯이, 스탈린과 모택동과 김일성의 수입대체 정책을 추구했다. 그가 이승만과 장면의 먼지 묻은 책상에서 발견한 경제개발계획이 그러했고, 한국의 학자와 관료가 이구동성으로 그렇게 주장했기 때문이다.

막상 실행해 보니까 금방 모순점이 드러났다. 어이쿠, 줄담배를 피우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중 상공부장관 박충훈의 건의를 받아들여, 그 둘을 절충한 중용의 정책을 선택했다. 그것이 바로 수출지향(export-driven development) 전략이었다.

자유무역과 보호무역을 절충하여, 약한 산업은 정부의 파격적 금융지원과 높은 관세로 경쟁력을 키우고, 이 첫 단계가 상당 수준 달성되면, 가차 없이 해외 시장으로 내몰아 경쟁력을 더 키우고 아예 젖을 떼는 전략이었다.

처음에는 가발, 합판, 섬유 등 금방 따라갈 수 있는 경공업에서 시작하여 인구 3천만을 겨우 넘어선 나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중화학공업과 전자산업을 기업가들을 윽박질러 가며 하나하나 밀어붙였던 것이다.

정유화학 단지를 찾은 박정희 대통령 내외.
정유화학 단지를 찾은 박정희 대통령 내외.

어떻게 알았는지 등소평이 박정희의 정책을 그대로 따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중국은 6차 5개년계획인 1981년부터, 대량아사를 낳은 스탈린의 수입대체 정책을 버리고 박정희의 수출주도 정책을 따르면서, 한국이 1964년부터 그랬던 것처럼 비로소 신화를 쌓기 시작했던 것이다.

인도도 극적인 변화가 있었다. 최대우방이었던 소련이 망하면서 같이 망하게 된 인도도 네루 가문을 몰아내고 1991년부터 나라시마 라오를 총리로 뽑았고 그는 시크교도 만모한 싱(후에 총리 역임)을 내세워 꼭꼭 틀어막았던 항구를 열어 손도 안 대고 코 풀던 국내 독점기업들의 비계 엉덩이를 뻥뻥 차면서, 박정희의 정책을 이어받으면서, 급격히 변하기 시작했다. 그전에, 베트남도 최대 우방 소련이 망하게 되자, 1986년부터 박정희의 뒤를 따르면서 천지개벽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박정희는 세계 모든 개도국의 경제모델을 세운 지도자이다.

실은 알고 보면, 이것은 산업화에 뒤졌던 미국도 그랬고 독일도 그랬고 일본도 그랬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비결을 후진국에게는 절대 알려 주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면은 몰라도 경제 부문은 그러니까, 중국은 한국에 17년, 베트남은 25년, 인도는 30년 정도 뒤진다고 보면 얼추 맞다. 이들 나라에 여행 갈 때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모름지기 개도국들은 미국이나 유럽의 백인이 시키는 대로 하면 안 된다. <문명화 사명>을 띠고 있는 백인들은 올챙이 적 생각은 못하고 철저히 위에서 언급했듯이 아담 스미스의 비교 우위 입장에서, 곧 자기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만 경제를 가르쳐 줄 뿐이다.

또는 정치의 배를 띄우는 경제와 사회와 문화의 바다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저 무식하고 위선적인 카터처럼 우습게도 공산독재에게는 제멋대로 통 크게 면죄부를 주면서, 미국을 믿고 따르는 나라들에 대해서는, 유독 자유민주와 시장경제를 흠모하고 따르는 나라들에 대해서만 지금 당장 ‘절대 민주주의’의 명분을 강요할 따름이니까,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하면, 중남미 식 또는 아프리카 식 빈곤과 혼란의 악순환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잘 살아 보세, 하면 된다]

국가 지도자는 누구나 알아듣기 쉬운 말을 전 국민에게 각인시켜야 한다. 그러나 북한처럼 구호가 너무 많아서는 발성 연습보다 못한 한갓 발악에 그친다. 5년에 1개, 10년에 1개면 족하다. 박정희는 단 두 마디로 18년간 통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이 바로 ‘잘 살아 보세’와 ‘하면 된다’이다.

이것은 국민의 의식과 무의식을 통째로 바꾼 역사적인 촌철살인이다.

한국은 공업과 상업이 무엇인지 청나라와 러시아를 물리친 일본을 통해 간접적으로 배웠다. 일제는 중등교육 이상은 철저히 차별했기 때문에 한국인은 한 세대가 넘는 기간 동안 어쩌다 그것도 운이 좋아야 구경만 했지, 공업과 상업을 제대로 배운 사람은 거의 없었다.

공업은 더러 구경이나 했지만, 근대적 상업은 아예 듣도 보도 못했다. 특히 무역에 무지했다. 일본은 패전 이전과 이후의 상업이 전혀 달랐다. 일본 하면 친절을 떠올리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1945년 이후의 일이다.

무엇보다 한국인은 일제시대를 거쳐도 여전히 양반과 상놈이라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봉건의식에 절어 있었다. 2천년 이어져 온 농업사회에, 다수의 인력이 필요하던 시대에, 그것은 잘 작동되었던 체제였기 때문에, 이상사회는 여전히 요순시대 내지 단군시대였던 것이다.

그저 밥술이나 먹고 사는 게 아니라 미국처럼 영국처럼 살려면 최소한 일본처럼 살려면, 아니 당시 한국보다 3배 잘 살았던 필리핀만큼이라도 살려면, 산업화가 필수적이었는데, 공업과 상업의 발전이 필수적이었는데, 정신적 양반이 전 인구의 80% 이상 차지했던 나라에서 ‘잘 살아 보세’라는 말은 영 상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박정희는 나라님으로서 서슴없이 이런 상놈의 말을 지엄한 공자님의 말씀보다 앞세웠던 것이다.

대한석유공사가 1964년 울산공장 준공을 앞두고 모 잡지에 게재한 광고. 당시엔 미국 회사가 국내 석유공급을 독점하고 있었다. '우리도 석유제품을 만들수 있다'는 광고 문구가 상황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대한석유공사가 1964년 울산공장 준공을 앞두고 모 잡지에 게재한 광고. 당시엔 미국 회사가 국내 석유공급을 독점하고 있었다. '우리도 석유제품을 만들수 있다'는 광고 문구가 상황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이제 잘살려면 옛날 양반처럼 가만히 앉아서 글이나 열심히 읽는 것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었다. 그러나 체면상 나서기가 어려웠다. 다행이랄까, 농지개혁과 6.25동란으로 아무리 잘살아 봐야 쌀 100석도 거의 불가능해졌다. 하향평준화가 광범위하게, 철저하게 이루어졌다.

요새 시세로 따져도 고작 연수입 2천만 원이 최고 부자였던 것이다. 그래서 너도나도 잘 살게 된다면야 체면 안 차릴 마음의 준비는 다 되어 있었다.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것이다. 잠재실업률이 50%가 넘던 나라에서 그 즈음 무의식적으로 누구나 상놈이나 할 상공업에 뛰어들 준비가 갖춰져 있었던 것이다.

이걸 문화적으로 살펴보면, 명분 문화에서 실리 문화로 바뀌는 경천동지할 패러다임 변화다. 박정희 이래로 명분은 민주, 실리는 경제개발로 이원화되었다. 언감생심 절대빈곤의 나라에선 선진국형 민주라는 명분은 너무나 비현실적이었지만, 조선 500년 명분 문화는 지식인을 중심으로 지금도 깊게 뿌리박고 있다. 그 결과가 박정희는 산업화에는 성공했지만, 민주화에는 실패했다는 운동권 공식이다. 북한식 진단이다.

박정희는 포병장교 출신답게 경제개발에는 과학기술이 바탕이 되어야 함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 공고와 공대를 대대적으로 키웠다. 후진국 지도자로선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수출 1억 달러 시대에 5천만 달러 대외원조를 전액 투자하여 과학기술연구소(KIST)를 건립했다.

그렇게 해서 모든 산업 기술을 선진화와 동시에 국산화하는 기반을 닦았던 것이다. 일단 공장이 들어서자, 너도나도 취직하려고 달려들었다. 상품을 팔려고 뛰어들었다. 박정희는 사장이 양반보다 더 높은 나라로 바꾸었다. 다방에는 웬 사장이 그렇게 많던지! 실리가 명분을 앞서는 나라로 혁신한 것이다. ‘조상과 가문 덕에 호의호식하는’ 과거지향 문화를 ‘내가 노력해서 나와 내 가족과 내 후손이 잘사는’ 미래지향 문화로 혁신한 것이다.

자원도 없고 자본도 없고 기술도 없는 나라에서 ‘하면 된다’는 말은 자기 체면이요 과대망상이다. 그런데 박정희는 주도면밀한 계획과 정확한 통계와 가시적 성과로 한민족의 거대한 잠재력에, 신바람의 용광로에 불을 댕기었다.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했던 박정희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안내를 받고 있다.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했던 박정희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안내를 받고 있다.

아무리 못 살아도 국가 정책을 따르면 잘살 수 있고, 무슨 일이든 노력하면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 여기저기서 척척 입증되자, 엽전의식에 찌들어 있던 민족이, 내심 여건만 갖춰지면 최소한 일본인보다는 잘할 수 있다는 민족이, 자존심이 유독 강한 민족이 드디어 꼬리뼈에 신바람의 불이 붙었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할 수 없다는 누천 년 패배의식에서, 노력해 봤자 소용없다는 누천 년 패배의식에서, 노력하면 누구나 스스로 가난을 극복할 수 있다는,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박정희는 모든 국민에게 스스로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주인의식을 심어 준 것이다.

천석꾼 양반에겐 천박하기 짝이 없는 이 두 마디로 한국인은 의식세계와 무의식세계가 전혀 다른 민족으로 거듭났다. 이 점에서 남북한은 숫제 다른 민족으로 바뀌었다. 노동자와 농민은 노예나 거지, 노동당원은 깡패, 배불뚝이 3대는 태양신인 곳에서, 주인은, 사람은, 딱 한 명밖에 없는 곳에서, 5천만이 누구나 주인인 나라의 신바람 인간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뭐, 미국이 핵 폐기 대가로, 눈 가리고 아웅 핵 폐기 대가로, 속임수 세계 챔피언의 핵 폐기 평화 쇼에 달러를 퍼 주면, 김정은이 개혁하고 개방한다고? 90% 착취 체제가 그대로인데! 2300만 노예 체제가 그대로인데!

개혁개방의 '마중물 달러'는, 베트남의 경우를 보면 알겠지만, 베트남이 무상원조 받은 것의 수십 배를, 김영삼 정부 이래로 지금 미국이 선심 쓰려는 것보다 수십 배를 이미 퍼 줬지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디로? 핵과 미사일과 생화학무기의 개발과 대량 생산에, 전 세계의 최고급 사치품 수입에!

베트남이 개혁하고 개방한 것은 선진국의 원조로 그리 한 것이 아니다. 소련의 무상원조가 끊기자, 스스로 대오각성하고 개과천선하여, 국방보다 경제를 우선하고, 무엇보다 90% 착취하던 공산 체제를 바꾸고, 임금이 노동자에게 대부분 돌아가게 국내적으로 먼저 개혁하고, 해외 기업의 게걸스런 입에 군침 도는 투자 여건을 갖추어 국내 시장을 개방하자, 삼성전자를 비롯하여 전 세계 기업이 너도 나도 다투어 뛰어든 것이다.

달러가 원천 봉쇄되어야 개혁·개방한다!

박정희는 세계 모든 후진국의 지도자요, 한국의 으뜸 계몽 지도자다. 한국인이면 그가 싫든 좋든 누구나 그 덕을 보고 산다. 눈을 도깨비의 그것처럼 새파랗게 치켜뜨고, 노발대발, 구만리 하늘에 홀랑 대머리가 닿도록 펄쩍펄쩍 뛰며 부정할지라도! 이런 자 중에 평생 제대로 된 직업 하나 없었다고 하면서도 대체 피 같은 돈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제 새끼는 절대 지상낙원에 김일성대학에 유학 보내지 않고 ‘뇌 숭숭 구멍 탁’ 광우병의 나라에 기를 쓰고 유학 보내는 자들이 숱하지만, 자랑스레! (2016. 3. 12.) (2018. 5. 16.)  

csj@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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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훈 2020-07-26 15:35:07
훌륭하신 글 잘 보고 갑니다.
요즘 좌좀들은 이런 글 보고도 깨닫지 못할겁니다.
무조건 반일,반미, 친중이니까요.

새마루 2018-05-24 22:19:41
박정희 대통령이 없었다면 과연 이 나라가 어찌 되었을까요? 임진왜란, 정유재란 양 난으로부터 한민족을 구한 민족의 영웅으로 성웅 이순신 장군이 지금 모든 한국인에게 최고로 존경받고 있듯이 하루빨리 박정희의 재평가가 이루어져 존경까지는 아니더라도 푸대접받거나 그 업적이 평가절하되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