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크도 마르기 전 휴지조각된 ‘판문점 선언’
잉크도 마르기 전 휴지조각된 ‘판문점 선언’
  • 김영호 교수
  • 승인 2018.05.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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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동맹으로 北 압박해야 오히려 남북관계 개선

북한은 김계관 외부성 제1부상을 내세워 미국이 ‘선폐기-후보상’과 같은 ‘리비아모델’로 압박할 경우 미북정상회담을 취소할 것이라는 ‘벼랑끝 전술’을 낡은 레코드판 틀 듯이 다시 들고 나왔다.

이에 대해서 백악관은 ‘리비아 모델’이 아니라 ‘트럼프식 모델’을 구상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이와 함께 미국은 미북정상회담 성사 여부와 상관없이 북한에 대한 최대 압박정책을 지속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미국과 북한이 핵 폐기 방식을 두고 서로치고 받는 사이에 ‘판문점 선언’은 잉크도 마르기 전에 휴지조각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북한은 판문점 선언에서 합의한 남북고위급회담을 ‘맥스선더’라는 한미연합군사훈련을 핑계로 이른 새벽에 일방적으로 취소했기 때문이다. 미북 ‘중재자론’을 내세워 북핵 문제 해결의 단초를 마련하고 남북관계 개선의 물꼬를 트려고 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기대가 물거품이 되어가고 있다.

‘판문점 선언’을 되살리기 위해 북한은 일방적 남북고위급회담 취소 이유를 한미군사훈련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심지어 태영호공사의 회고록 <<3층 서기실의 암호>>에 그 책임을 전가하고 자유를 찾아 대한민국으로 망명한 그를 ‘추방’시켜야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이 북한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 사이에서도 나오고 있다. 청와대 국민청원 사이트에 이런 주장들이 올라오는 것은 충분히 예상되었던 바이지만 건전한 상식을 가진 국민이라면 이런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北, 미국과 직접 담판파가 주도

이 시점에서 김계관을 내세워 미국을 압박하는 김정은의 대남 및 대미 전략과 전술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태영호 공사가 최근 출간한 책 <<3층 서기실의 암호>>에 따르면 북한 내부에는 ‘한국 역할 중시파’와 ‘미국과의 직접 해결파’로 전략적 입장을 달리하는 두 세력이 나뉘어 존재한다.

김정일은 한국을 통하지 않고 미국과 직접 담판을 통해서 북한 핵 개발에 대한 압력에 대처하면서 끝까지 핵 무력을 완성해야 한다는 ‘미국 담판세력’에게 힘을 실어주었다고 한다. 이 세력을 대표하는 핵심 인물이 2016년 사망한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이고, 김계관은 그 자리를 물려받아서 그 노선을 그대로 잇고 있다. 이번 미북정상회담 취소 발언에 김계관을 내세운 것을 보면 김정일과 마찬가지로 김정은도 ‘미국 담판 세력’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북한 내부의 정책결정과정에 해당되는 ‘블랙박스’의 작동과정을 들여다 보면 북한의 대남 및 대미 정책을 ‘외부적 요인’에 의해서만 이해하고 정책을 마련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잘못된 전제에 서 있는 것인지를 쉽게 알 수 있다.

북한은 체제 유지를 위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핵을 개발하고 이를 군사적, 정치적 무기로 미국의 한국에 대한 핵우산 철거와 주한미군 철수를 통해서 적화통일을 해야 한다는 ‘내부의 혁명 논리’로 대남 및 대미 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하고 있다.

이 점을 오해할 경우 북한의 대남정책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그 하나의 예로서 2001년 5월 북한을 방문한 예란 페르손 총리는 ‘6·15 남북공동선언’에서 합의한 김정일 서울 방문 문제를 제기했다. 태영호 공사의 회고록에 따르면 회의가 끝난 후 김정일은 강석주에게 “김대중 대통령은 아직도 내가 서울에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아닌가. 참 어리석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냉전 당시 미국의 대소련 봉쇄정책을 입안한 전략가인 조지 케넌의 표현을 빌리면 북한은 ‘태엽감은 장난감 자동차’와 같다고 보면 된다. 북한은 ‘내부의 혁명적 논리’에 의해서 핵 개발과 대남 도발을 일삼지만 대북 군사적, 경제적 제재와 같은 외부의 강력한 압박과 장벽에 마주치면 멈추거나 주춤할 수밖에 없는 그런 성격을 가진 체제이다.

이렇게 보면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으면 군사공격도 불사하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최대의 압박 정책 때문에 그 위기를 만회하려고 북한이 문재인 대통령의 중재를 핑계로 미북정상회담에 동의했다고 볼 수 있다.

◇유화정책 펼치면 '핵 포기'한다는 환상

북한은 미북정상회담 개최를 정당화하는 핑계로 미국과 한국의 ‘대북한 적대시정책’ 때문이라는 그럴듯한 이유를 내세우고 있다. 여기서 ‘적대시 정책’은 ‘외부적 요인’으로 북한의 핵 개발을 정당화하려는 조작된 논리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는 심지어 전문가들도 부지불식간에 북한의 그릇된 논리를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마치 북한이 만들어내는 모든 문제의 원인들이 외부에 있기 때문에 한국과 미국과 일본이 북한에 대해서 조금 더 유화적 정책을 펼치면 마치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개혁과 개방으로 나올 것이라는 환상을 갖는 경우를 본다. 여기에 ‘종족적 민족주의적 환상’이 겹쳐지면 ‘판문점 선언’과 같은 비현실적 합의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현재 북한이 핵과 장거리 미사일을 개발하여 한반도와 동북아 지역 평화를 위협하는 원인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북한 체제 내부에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북한은 수령세습체제를 내세우지만 최고권력 승계를 민주적으로 제도화하지 못해 만성적으로 불안정한 정치체제다. 북한은 내부적으로 경제적으로 활력을 잃어버린 사회이다. 그렇다고 해서 개방과 개혁을 할 수도 없는 것이 북한 주민들이 외부 세계를 알게 되면 김정은 체제가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북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한국 주도의 통일을 달성하는 방법은 분명해진다. 북한의 정책이 ‘미국 담판 세력’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하면 문재인 대통령은 북한과 미국을 중재하겠다는 ‘종족적 민족주의 사고’에 선 대북정책과 대미정책을 버려야 한다. 한미동맹과 국제공조를 더욱 철저하게 다져나가면서 지속적으로 북한을 압박해 나갈 때 오히려 남북관계 개선을 물꼬를 틀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kyh2018@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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