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합 집행부와 시공사업단 간 갈등으로 공사가 중단된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 재건축사업과 관련해 자금을 대출해 준 금융사들이 만기 전 대출금 회수에 나설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유치권 행사’ 현수막이 붙은 둔촌주공 재건축사업 현장. /연합
조합 집행부와 시공사업단 간 갈등으로 공사가 중단된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 재건축사업과 관련해 자금을 대출해 준 금융사들이 만기 전 대출금 회수에 나설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유치권 행사’ 현수막이 붙은 둔촌주공 재건축사업 현장. /연합

재건축사업을 추진할 때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사업 지연이다. 재건축사업이 장기화되면 차입한 금융비용의 이자가 대폭 늘어나고 조합원의 추가 분담금도 급증하기 때문이다. 수익도 감소한다. 재건축사업을 ‘속도전’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 재건축사업은 조합과 시공사업단(현대건설·HDC현대산업개발·대우건설·롯데건설)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공정률이 52%에 이른 지난 15일 공사가 전면 중단된 상태다.

조합 집행부는 지난 16일 정기총회를 열고 2019년 12월 7일에 있었던 임시총회의 공사비 증액 변경 계약 의결을 취소하는 안건을 표결에 부쳤다. 이 결과 참석 인원 4822명 가운데 94.5%인 4558명이 찬성표를 던졌다. 현 조합 집행부와 시공사업단 갈등의 원인인 5600억원의 공사비 증액 계약에 대해 조합원 대다수가 반대 의견을 표명한 셈이다.

조합은 공사비 증액과 관련한 의결을 취소한 것과 별도로 지난달 21일 서울동부지법에 공사비 증액 변경 계약을 무효로 해달라는 내용의 소송도 제기했다. 특히 조합은 시공사업단의 공사 중단 기간이 10일 이상 계속되면 계약 해지까지 추진하겠다는 초강수를 둔 상태다.

둔촌주공 재건축사업의 공급물량 1만2032가구는 올해 서울 전체 공급 예정 물량의 4분의 1에 달한다. 입주가 지연되면 조합원의 피해뿐 아니라 공급이 부족한 서울 주택시장 안정에도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 서울시가 다시 한번 중재에 나선 배경이다.

20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서울시는 조합과 시공사업단에 협상을 위한 자료 준비를 요청한 상태다. 공사 중단에 따른 사태 장기화를 막기 위한 것이다. 서울시는 그동안 강동구청과 함께 10차례의 중재에 나선 바 있다. 정비사업 코디네이터를 배정해 의견을 조율했지만 양측이 평행선을 달리자 지난달 중재에서 사실상 손을 뗀 상태다.

하지만 양측이 강(强) 대 강(强)의 대치를 이어가며 공정이 절반 이상 진행됐음에도 공사가 중단되는 사상 초유의 사태에 이르자 다시 중재에 나선 것이다. 서울시가 논의 테이블을 마련하더라도 중재가 원활하게 진행될지는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또다른 악재가 부상하고 있다. 조합에 돈을 빌려준 금융사 17곳의 대표격인 NH농협은행이 이르면 이달 말 회의를 열어 대출의 기한이익상실(EOD) 돌입 여부를 논의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기한이익상실이란 돈을 빌려 간 차주의 신용 위험이 커졌을 때 금융사가 계약을 파기하고 만기가 도래하지 않은 대출금을 회수하는 것이다.

대주(貸主)인 금융사 단체(대주단)가 조합과 맺은 대출 계약은 총 2조1000억원 규모다. 공사 등에 쓰는 사업비 대출이 7000억원, 공사 기간 중 조합원 전세보증금 명목의 이주비 대출이 1조4000억원이다. 오는 8월 만기가 도래하는 사업비 대출은 시공사업단 연대 보증 형태다. 건설사 4곳이 신용도가 낮은 조합의 빚보증을 선 것이다. 만일 기한이익상실 돌입이 결정될 경우 시공사업단이 원금을 대신 갚은 뒤 조합에 구상권을 청구하게 된다.

대주단은 조합과 시공사업단의 최근 갈등이 기한이익상실 돌입 사유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오는 7월이 만기인 이주비 대출은 주택도시보증공사(HUG)의 보증을 받았다. 기한이익상실 돌입이 이루어지면 주택도시보증공사가 먼저 갚고 조합에 구상권을 청구할 것으로 보인다. 조합은 조합원 보유 토지의 재산권 행사를 대리하는 단체에 불과한 만큼 기한이익상실 돌입에 따른 피해는 고스란히 조합원에게 돌아간다.

현재 대주단 내부에서는 갈등 봉합 가능성을 믿고 기다리자는 의견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대주단이 기한이익상실에 돌입하면 디폴트(채무불이행)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기한이익상실에 돌입하지 않고 만기 때 기존 대출 계약을 연장하더라도 조합원의 이자 상환 부담은 큰 폭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대출 계약 연장 때까지 양측의 갈등을 해소하지 못하면 시공사업단의 연대 보증을 받기 어렵다"면서 "시공사업단 보증이 없다면 금리가 올라 조합원이 감당할 이자 상환 부담이 큰 폭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기한이익상실에 돌입하든 이번 갈등을 넘기고 대출 계약을 연장하든 조합과 시공사업단 간 합의가 없으면 조합원은 피해를 볼 수밖에 없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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