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파나마 수교 60주년에 살펴보는 '파나마의 역사·문화'

美, 대서양 넘어 태평양 국가로 발돋움하는 데 결정적 기여
세계적 중계무역지대로 꼽혀...수교기념 문화협력 확대 합의

‘파나마 운하’로 유명한 파나마와 수교 60주년을 맞았다.
‘파나마 운하’로 유명한 파나마와 수교 60주년을 맞았다.
정진규 주파나마 한국대사(오른쪽)와 지셀 곤살레스 파나마 문화장관이 19일(현지시간) 파나마시티에서 수교 60주년 기념 문화협력 양해각서(MOU) 체결했다. /주파나마 한국대사관
올해로 한국-파나마 수교 60주년이다. 1914년 미국이 완공한 ‘파나마 운하’는 세계사의 새 장을 열었다.
올해로 한국-파나마 수교 60주년이다. 1914년 미국이 완공한 ‘파나마 운하’는 세계사의 새 장을 열었다.

중미(중앙아메리카)국가 파나마와 수교한 지 올해로 60주년이다(북한-파나마는 미수교). 정진규 주파나마 한국대사가 19일(현지시간) 지셀 곤살레스 파나마 문화장관과 ‘수교 60주년 기념 문화협력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고 주파나마 대사관이 밝혔다.

대사관에 따르면, 양국은 올해 파나마시티에서 6월 한·파나마 음식축제와 9월 한국 전통문화 공연 등의 기념행사를 함께 주최하기로 했다. 아울러 ‘K팝 월드 페스티벌’ ‘대사배(杯)태권도대회’ 등 대사관 주최 문화행사의 성공적 개최를 위한 협력도 약속했다.

파나마 역시 K팝 등 한국 대중문화 인기가 높은 곳이다. 특히 드라마는 강간·불륜·마약·매춘·암살·인신매매 등을 다루는 현지의 대중 서사장르와 다른 차원의 평가를 받는다. 사랑·우정·가족애·어른공경 등을 다뤄 재미있게 풀어낸다는 것이다. 파나마 국영방송사가 한국드라마를 자주 수입해 방영하는 이유다.

파나마는 1인당 GDP가 중남미 최고 수준이다(12000달러 이상). 홍콩과 함께 세계적 중계무역지대로 꼽힌는 ‘콜론 자유무역지대’가 있다. 공용어는 스페인어, 인구의 70%가 메즈티조(유럽인·원주민 혼혈)다. 가장 큰 관광지는 ‘파나마 운하’이며, 아름다운 해변의 ‘콘타도라 섬’ ‘산 블라스 군도’ ‘코로나도 해변’ 등도 인기다. 산 펠리페의 카스코 비에호 지역은 1800년대 초 도시 건축물이 잘 보존돼 있다(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파나마는 남·북미 대륙 사이의 가느다란 지협(地峽)에 위치한다. 국토면적이 우리나라의 75%에 해당하는 작은 나라지만(인구 약 400만), ‘파나마 운하’로 운명이 달라졌다. 1821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할 당시엔 콜롬비아의 1개 주(파나마州)였으나, 1903년 11월 3일 ‘파나마 공화국’으로 독립했다.

운하 건설권을 얻기 위한 미국의 배후 노력이 컸다. 그 11년 뒤 1914년 8월 15일 미국은 ‘파나마 운하’를 완공한다. 길이 82km에 불과한 ‘파나마 운하’가 대서양-태평양 간 항해 거리를 반 이하로 줄이면서 인류사의 새 장이 열린다.

미국은 대서양을 넘어 태평양 국가로 발돋움하게 됐다. 미 해군전함이 태평양-대서양을 빠르게 오갈 수 있게 된 것이다. 한반도가 미국인들 시야에 더 가깝게 들어오게 됐다는 것도 큰 의미를 가진다. 일제 식민지 조선에 근대문명의 씨를 뿌리고 가꾼 미국인 개신교 선교사들의 역사 또한 그 연장선에 있다.

운하는 16세기 스페인의 아메리카 대륙 정복 때부터 구상됐으나, 모기의 창궐(풍토병) 등 ‘원시의 힘’ 앞에 무릎을 굻었다. 이후 수에즈 운하를 건설한 프랑스도 덤볐지만 같은 이유로 좌절을 거듭했을 뿐이다. 300년 이어진 ‘운하의 꿈’을 끝내 완성시킨 것은 미국이었다.

19세기 후반 미국이 중남미로 영향력을 확장하는 가운데,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Jr, 재임 1901~1909년)의 안목이 주효했다. 국방부 차관보 시절 스페인을 해군력으로 물리쳤고, 대통령 재임시엔 이른바 ‘백색함대’를 세계일주시키는 등 ‘20세기=미국의 세기’를 각인시켰다.

누구보다 파나마 운하의 중요성을 정확히 파악한 인물이었다. 여러 다른 주장이 있었으나, 루스벨트는 취임한 이듬해 프랑스로부터 파나마 운하 사업권을 4000만 달러에 사들인다. 파나마 분리주의자들을 후원한 것도 결국 그의 정치적 외교적 판단이었다.

1970년대 남미에 민족주의 열기가 고조되면서 ‘파나마 운하’ 이권을 회수하려는 운동이 일어난다.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1977년 운하 관련 권한 반환이 약속되고, 1999년 12월 31일을 기점으로 운하 소유권이 파나마 측으로 완전히 넘어갔다.

2016년 6월 26일 운하 확장공사를 마무리해 현재에 이른다. 1990년 군대를 해체한 이래 안보를 미국에 맡겨온 것도 주목된다. 지정학적 숙명을 생존·번영을 향한 적극적 조건으로 활용하며 살아가는 또 하나의 지구촌 멤버 파나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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