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소중했던가


버스가 지리산 휴게소에서 십 분간 쉴 때,
흘러간 뽕짝 들으며 가판대 도색잡지나 뒤적이다가,
자판기 커피 뽑아 한 모금 마시는데 버스가 떠나고 있었다.
종이컵 커피가 출렁거려 불에 데인 듯 뜨거워도,
한사코 버스를 세워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가쁜 숨 몰아쉬며 자리에 앉으니,
회청색 여름 양복은 온통 커피 얼룩.
화끈거리는 손등 손바닥으로 쓸며,
바닥에 남은 커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렇게 소중했던가,
그냥 두고 올 생각 왜 못했던가.
꿈 깨기 전에는 꿈이 삶이고,
삶 깨기 전에는 삶은 꿈이다.

이성복(1952~ )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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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 시인의 ‘그렇게 소중했던가’는 통찰의 시다. 통찰을 꼬집어 무어라 말할 수 없지만 전에 인식하지 못하였던 심리적 상태를 비로소 알게 되는 일이다. 한 걸음 더 나가면 깨달음에 이른다. 그것은 느낌과 지각, 인식을 수반하면서 문득 다가온다. 목욕 중에 왕관에 불순물이 섞여있는지를 알아낸 아르키메데스 일화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된다. 그렇듯 과학자는 과학적 의문을 풀기 위해 심지어 꿈속에서조차 감각을 열어놓고, 시인은 일상 속에 숨겨진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오감(五感)을 열어놓는다.

어느 매체와 인터뷰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어쩌면 시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양식인지도 몰라요. 시는 진실과의 우연한 만남이에요." 그의 시론에 의하면 시인이란 말할 수 없는 무언가를 찾으려는 사람이다. 시를 창작하는 행위는 비유컨대 캄캄한 지하실에서 무언가를 찾기 위해 켜는 한 개비 성냥불빛이다. 그 덧없고 짧은 불빛에 사물은 잠시 모습을 드러냈다가 자취를 감춘다. 불빛은 무력하고 더구나 우리를 위로해주거나 해방시켜주지도 못한다. 하지만 시인은 짧은 불빛에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진 그 무엇을 보기 위해 또다시 성냥불을 켠다. 왜냐하면 사물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어둠에 숨어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소중했던가’는 집착의 어리석음을 통찰하는 시다. ‘한사코 버스를 세워야겠다는 생각’에 ‘자판기에서 뽑은 종이컵 커피’를 들고 뛰다가 손을 데이고 ‘여름 양복은 온통 커피 얼룩’이 된 어이없는 일을 돌이키며 ‘꿈 깨기 전에는 꿈이 삶이고, 삶 깨기 전에는 삶은 꿈이다’는 결론에 이른다. 집착을 버리지 못하면 미망(迷妄)을 벗어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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