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군 퇴각 속, 이현상 유격대는 다시 지리산으로
인민군 퇴각 속, 이현상 유격대는 다시 지리산으로
  • 유진
  • 승인 2018.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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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인민군 퇴각과 혼란 수습

앞서 언급한 것처럼 북한은 서울을 포함한 남한지역 대부분을 장악하고 낙동강계선까지 진출했던 전쟁초기에 북한에서 파견한 정치공작대와 기존의 남로당원들을 동원해 노동당을 재건하고 인민위원회와 사회단체 등을 조직했다. 또 토지를 몰수하고 의용군 강제 징집과 남한의 인적 물적 자원을 약탈했다. 이러한 작업들은 당연히 북한이 전쟁에서 승리해 남한지역을 모두 점령하고 한반도 전체를 통치할 것이라는 전제 하에 추진되었다.

그러나 미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낙동강계선까지 진격했던 북한군은 보급선이 끊겨 어쩔 수 없이 퇴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이때부터는 당연히 전쟁초기와 같은 방식의 공작을 추진할 수 없게 되었다.

북한이 점령지역에서 본격적으로 시행했던 노동당 조직 재건 작업도 마찬가지였다. 북한은 자신들이 일으킨 6·25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 믿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남한 전 지역을 자신들이 영원히 통치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지하에 있던 노동당원들을 밖으로 끌어내 마음대로 드러내놓고 합법적이고 공개적인 조직 활동을 벌이도록 했던 것이다.

◇정체 드러난 노동당원

따라서 그전에는 자기가 사는 지역이나 마을에 노동당원이 있는지 없는지, 있다면 누가 노동당원인지 전혀 몰랐던 주민들이 자신이 사는 지역이나 마을에 노동당원이 누구인지, 노동당원들이 어떤 활동을 했는지 모두 알게 되었다. 이런 관계로 노동당원들은 더 이상 한국군과 유엔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조직적인 활동은 물론 생활할 수조차 없는 형편이 되었다.

국군에 붙잡힌 지리산 빨치산. 왼쪽에서 두 번째가 토벌대장 송요찬 준장.
국군에 붙잡힌 지리산 빨치산. 왼쪽에서 두 번째가 토벌대장 송요찬 준장.

이와 같은 여건과 상황 하에서 북한은 한국군과 미군을 위시한 국제연합군 즉 유엔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유격대 활동을 강화하면서 지하당을 재건하기 위한 공작과 정보수집 등에 역점을 두고 대남공작을 벌였다.

북한지도부는 먼저 갑작스런 인민군 퇴각에 따른 남한 내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였다.

이를 위해 미처 북한군을 따라 퇴각하지 못하고 잔류한 노동당원들과 대중단체 조직원들은 각 도·시·군 당위원회의 지도하에 산악지대로 들어갔다. 이들은 유격대를 편성하고 당 조직 지도 아래 습격과 파괴, 살인과 약탈 등을 통해 생존했다.

북한노동당 지도부는 전쟁 상황이 불리하여 인민군이 전략적인 후퇴를 하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각 당조직들은 비합법적인 지하당으로 전환하고 식량을 비롯해 미국과 한국군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숨기거나 파괴하고 활동이 가능한 모든 당원 및 조직원들은 산악지대에 들어가 각 도당 지도부 지도 밑에 유격대활동에 참가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1950년 9월 말과 10월 초에 각 도당지도부는 지정된 산악지대로 산하 당 조직들과 대중단체 가담자들을 이동시키고 입산자들을 규합해 유격대를 편성했다. 유격대에는 북한에서 정치공작대원으로 파견되었다가 인민군을 따라 퇴각하지 못한 노동당 및 정권기관, 사회단체 간부, 내무원 및 정치보위원들과 대열에서 떨어진 인민군 군인들도 합세했다.

6·25 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10일 충남 연기군 전의에서 미군에 붙잡힌 빨치산. 인민군의 남하에 호응, 교란작전을 벌이다 체포된 것으로 보인다. 출처=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
6·25 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10일 충남 연기군 전의에서 미군에 붙잡힌 빨치산. 인민군의 남하에 호응, 교란작전을 벌이다 체포된 것으로 보인다. 출처=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
이현상
이현상

한편, 1949년부터 지리산지구에서 인민유격대 2병단을 편성해 유격전을 벌였던 이현상 유격대 경우는 인민군대가 영호남지역으로 진격하자 하산해 출신 지방의 당 및 인민정권 기관 간부로 활동하고, 일부는 이현상 지휘 아래 인민군대에 합류해 협동작전을 펼쳤다. 그러다가 인민군이 패주하자 다시 지리산지구로 입산한 다음 후퇴의 길에 올라 1950년 11월 중순 강원도 세포군 후평리에 도착했다.

◇이승엽, 이현상을 유격대 총대장으로 임명

이 무렵 '서울지도부' 책임자로 남한 점령지역 내 전체 업무를 총지휘하고 있던 이승엽이 후평리에 먼저 도착해 후퇴해오는 당원

이현상의 죽음을 보도한 1950년 9월 23일자 동아일보.1
이현상의 죽음을 보도한 1950년 9월 23일자 동아일보.1

및 간부, 개별적으로 후퇴하는 인민군 장병들을 규합해 유격대를 편성한 다음 다시 남파시키는 공작을 지휘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승엽은 후퇴해 들어온 이현상과 여운철 등 남로당 주요간부들과도 만나 향후 남한지역 내에서의 당 조직과 유격대 활동에 대해 토의했다.

당시 이승엽은 충청남북도와 전라남북도, 경상남북도 등 6개 도당에 대한 지도권한을 여운철에게 위임하고 이현상에게는 유격대의 통일적인 지도권한을 위임했다. 물론 이는 전적으로 이승엽의 독자적인 판단에 따른 결정이었다. 이 결정은 나중에 이승엽에 대한 숙청의 빌미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아무튼 이승엽 지시에 따라 강원도 후평리에서 편성된 남조선인민유격대는 이현상을 부대장으로 하여 지리산을 향해 다시 남하했다. 이때 이현상 휘하에는 유격대원 약 800여명이 있었다.

yj@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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