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천
이주천

최근 우크라이나전쟁은 우리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평화는 자주적 힘에 의해 유지될 수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자주국방 토대를 닦았던 인물이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다.박정희 대통령의 자주국방론은 1960년대 베트남전쟁 참전과 연결돼 있다.

60년대 초 5.16군사혁명 당시 한국의 국방력은 병력과 장비 면에서 북한군의 50%에 불과했다. 남한은 모든 장비와 무기를 미국에서 수입하거나 원조를 통해 들여온 반면에 북한은 소총에서부터 전차까지 각종 무기를 자체 생산하였다. 한국군은 60만명이 넘는 대군으로 성장하고 6.25전쟁을 통해 많은 경험을 축적했으나, 현대적 장비와 무기체계에 익숙하지 못했다. 한국군은 미군의 보조역할에 머물렀던 구식 군대에 불과했다. 현대전에서 필수적인 소총, 탱크 등 신형무기들을 자체적으로 양산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미국의 기술제공 기피, 그리고 각종 견제에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은 군 현대화를 위한 절호의 기회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이 2차대전에서 패망한 후 한국전쟁을 통해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어낸 점에 대해 사석에서 한탄하곤 했다. 이제 한국이 베트남전쟁에서 그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박 대통령은 미국 케네디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한국군의 베트남 참전에 대해 떠보았다. 하지만 자존심이 강한 케네디는 그 제안을 거절하였다. 이후 미국은 베트남 수렁에 빠졌다. 전쟁은 확전됐고, 결국 존슨은 통킹만사건을 통해 미군의 대규모 투입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미국 내 반전데모로 인해 파병의 한계에 직면한 미국은 우방에게 도움의 손길을 청했다. 박 대통령은 대미 발언권 강화와 미국의 대한(對韓 )지원 확대, 한국군 군사력 강화에 이용하기 위해 베트남 참전을 서둘렀다. 철저한 용미주의자인 박 대통령은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미국과의 외교협상력 극대화를 위해, 차지철로 하여금 국회에서 야당과 더불어 베트남 파병을 반대하도록 했다.

1965년 5월 중순, 존슨 대통령이 초청한 방미길에 오른 박 대통령은 국무총리 정일권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기회에 우리 국군의 장비 현대화도 적극 타진해 볼 것입니다. 휴전선에서 정예부대를 뽑아내는 대가로 당연하지요. 우리에게 닥쳐온 기회를 선용해야 합니다." 워싱턴에서 열린 박정희-존슨간의 한미정상회담(65.5/18-19)은 미국의 대한 공약과 지속적인 군사원조 제공에 합의하면서 박정희 외교의 절정을 이루게 된다. 여세를 몰아서 이동원 외무부장관과 브라운 주한미대사간에 브라운각서(66.3.4)가 체결된다. 각서의 내용은 파병에 따른 한국군 현대화를 위한 장비제공, 한국군 참전용사의 봉급을 미 국방부가 지불, 한국의 경제발전을 위한 차관 제공, 기본 병기의 국산화 등이었다. 외교적 쾌거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주장한 자주국방론의 핵심은 이렇다. "북한의 국지도발은 자주적 방어태세를 갖추어 미군 도움 없이 해결한다. 독자적 무기체계 개발에 따른 방위산업 육성(무기국산화)과 독자적인 전략과 전술개발에 따른 한반도 작전계획 수립 그리고 군사제도의 개혁을 추진한다." 군수산업의 개발을 고도경제성장 정책과 동시에 추진한다는 민군합동작전이었다.

한국의 베트남 참전이 절정을 이루던 60년대 후반기 대한민국을 어느덧 세계를 향해 진군나팔을 힘차게 불고 있었다. 국민들은 희망과 자신감에 넘치고 있었다. 박 대통령은 베트남전쟁이 던져준, 자주국방을 위한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은 위대한 전략가였다. 우리 대한민국은 그런 지도자가 존재했던 시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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