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
/연합

미국 달러에 버금가는 안전자산으로 꼽히던 엔화의 가치가 20년 만에 최저치로 고꾸라지고 있다. 미국이 고강도 긴축에 나서고 있지만 일본은 돈 풀기를 유지하면서 미일 간 금리 차가 점점 더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엔화 약세, 즉 엔저(円低)를 유도하는 ‘아베노믹스’를 지금도 고수하고 있는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엔·달러 환율은 달러당 125엔인 ‘구로다 라인’을 뚫고 129엔대로 올라섰다.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BOJ) 총재는 지난 2015년 엔화가치가 125엔 가까이로 급락하자 "엔저가 더 진전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발언해 추가 하락을 막았다. 이후 달러당 125엔은 일본은행의 최종 환율 방어선으로 여겨져왔다.

하지만 지난 22일 도쿄 외환시장에서 엔·달러 환율은 달러당 128.14엔까지 올랐다. 장중 한때 129엔을 돌파하기도 했다. 지난달 이후 엔화가치는 11%나 하락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최근 시장 전문가 7명을 대상으로 시행한 긴급 설문조사에 따르면 5명은 올해 엔화가 달러당 130엔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일본 경제가 미국 9·11 테러 여파로 심각한 경기침체를 겪은 2002년 1월 달러당 135엔을 기록한 이후 20년 만에 통화가치가 최저 수준으로 내려앉은 것이다.

일본 통화당국은 무한정 돈을 풀어 엔화 약세를 유도하는 아베노믹스를 지금도 고수하고 있다. 엔저는 지난 2012년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아베노믹스가 겨냥한 양적 완화, 확장 재정, 구조 개혁 등 이른바 ‘세 개의 화살’ 중 첫 번째다. 엔저가 일본 기업의 수출 경쟁력을 높이고 주가를 끌어올려 임금 상승과 소비 증가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기대한 것이다.

아베노믹스의 첫 번째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인물이 구로다 총재다. 구로다 총재는 아베 전 총리의 추천으로 일본은행 수장이 된 이후 2018년 연임에도 성공했다. 내년 4월까지 임기를 모두 채우면 일본은행 역사상 유일하게 재임기간이 10년을 넘은 총재가 된다.

이 같은 일본은행의 통화정책에 문제를 제기한 것은 스즈키 준이치 일본 재무상이다. 그는 지난 15일 기자회견에서 "기업이 비용 상승분을 가격에 반영하지 못하고 임금 인상이 불충분한 상황에서의 엔화가치 하락은 ‘나쁜 엔저’"라고 말했다.

일본 내부에서는 스즈키 재무상이 ‘현 상황을 제대로 짚었다’는 공감대를 얻고 있다. 하시모토 에이지 일본철강연맹 회장은 지난달 말 기자회견에서 "일본 제조업 역사상 처음으로 엔저 리스크가 발생했다"고 말했다. 엔화 약세로 수출 기업의 가격 경쟁력이 오르는 효과보다 수입 원자재 가격의 급등 부담이 더 커졌다는 것이다. 실제 일본은 8개월째 무역수지 적자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 3월에도 4124억엔(약 3조9520억원)의 무역수지 적자를 기록했다.

지난 10년 간 일본 기업이 생산거점과 연구시설을 해외로 옮긴 결과 엔화 약세가 수출에 기여하는 효과도 크게 줄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지난 1995년까지만 해도 일본의 전체 수출 가운데 자국 내 생산 부가가치 비중이 94%였다. 2018년 이 수치는 83%로 떨어졌다.

일본 경제는 통상 엔화가 약세를 보이는 시기에 수출 기업의 실적 호조를 앞세워 경기를 회복시켜 왔는데, 이번에는 이 같은 경로가 전혀 먹히지 않고 있다는 분석이다. 일본 서민도 고통받고 있다. 엔화의 구매력 감소와 함께 수입물가가 치솟다 보니 일본 사회에서는 "일본이 가난해졌다"는 인식까지 확산되고 있다.

하지만 구로다 총재는 금융 완화를 지속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시장에서는 일본은행이 나홀로 금융 완화를 고수할 수밖에 없는 ‘외통수’에 걸렸다는 말까지 나온다. 무엇보다 통화정책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는데 긴축으로 돌아서면 지난 10년 간의 금융 완화 정책을 스스로 부정하는 꼴이 된다.

엔화가치를 올리려다 자칫 재정을 파탄 낼 수 있다는 점도 일본은행이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다. 지난해 말 일본의 국채 잔액은 처음으로 1000조엔(약 9745조원)을 넘어섰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은 263%에 달한다. 미국의 133%와 영국의 95%에 비해 두 배가 넘는다.

일본은행은 일본 정부가 발행하는 국채의 44.1%를 사들여 원리금 상환 부담을 줄이고 있다. 일본 재무성은 일본은행이 금리를 1~2%포인트 올리면 연간 원리금 부담이 3조7000억~7조5000억엔 늘어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첩첩산중인 셈이다.

저작권자 © 자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