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함께 한 청소-점심시간 '교육실험'···쌩큐! 수재들
3년 함께 한 청소-점심시간 '교육실험'···쌩큐! 수재들
  • 최성재
  • 승인 2018.05.2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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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 능력에 맞춰 가르치는 것, 그것이 바로 평등 교육이다.]

80년대말에 나는 고척고(高尺高)로 전근 갔다. 아카시아 향기 가득하고 비행기 소리 우렁찬 학교였다. 고척고 뒷동산은 온통 아카시나무 숲으로 뒤덮여 있어 5월이면 향긋한 냄새로 벌떼만 유혹하는 게 아니라, 사람도 나이 불문 남녀 불문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지그시 감고 코를 벌름거리게 만들었다.

그 무렵 인천공항은 몽상가라 비웃음 사던 사람들이 막 신기루만 같은 무지개 꿈을 펼치던 때라, 김포공항에 시도 때도 없이 이착륙하는 비행기들은 고척동부터 시작해서 멀리 김포까지 평균 가청 주파수대를 꽤나 높였다. 당시에도 김포공항 코앞의 공항고는 방음벽이 있었지만, 고척동은 그저 구시렁대는 정도로 그쳐야 현실감이 있다는 소리를 듣던 1인당 국민소득 3천 달러 시대라, 비행기의 우렁찬 독창과 창문의 요란한 떼창에 수시로 수업이 중단되곤 했다.

고척고에서 5년간 근무했는데, 그 좋아하는 담임을 나는 1년밖에 못 맡았다. 이유는 아직도 모른다. 전교협 이어 전교조의 숨은 두뇌라는 소문 때문이라는 소문은 들은 적은 있다. 낭설! 학원 민주화를 바랐지만, 나는 단결권과 단체교섭권만 필수라고 봤을 뿐, 애초부터 교사의 단체행동권은 반대했기 때문에, 들러리 서고 집회에 몇 번 나가고 후원금 낸 정도에 그쳤다. 몇 년 지나서는 그마저도 그만두었지만.

초봄이면 철쭉꽃의 진홍 빛에 취하고 늦 봄이면 아카시아 향기가 감성을 자극했던 고척고등학교 교정. 내게 이 곳은 잊을 수 없는 평등교육의 실험장이었다.
초봄이면 철쭉꽃의 진홍 빛에 취하고 늦 봄이면 아카시아
기가 감성을 자극했던 고척고등학교 교정. 내게 이 곳은
잊을 수 없는 평등교육의 실험장이었다.

◇비담임 신분 덕에 교과서 집필 기회가...

비담임 신분 덕분에 나는 오히려 경제적으로 큰 덕을 보았다. 운 좋게 서울대 은사님들의 교과서 집필에 심부름 노릇을 할 수 있었고, 교사용 지도서는 내가 주도해서 썼고, 꼭 낙숫물 효과는 아니지만 참고서도 이곳저곳으로부터 의뢰를 받아, 누구보다 원고와 씨름을 많이 했던 것이다.

당시는 5차 과정 교과서였는데, 선생님들이 파격적으로 지분은 작지만 교과서 인세도 받게 해 주셨다. 아마 교과서 인세를 받은 교사는 내가 처음일지도 모른다. 아파트 가격이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른, 인심 뒤숭숭 시절에, 나는 인세와 원고료로 26평 아파트도 장만할 수 있었다. 후에 알고 보니 시세의 10배나 주고 전라도에 땅도 샀는데, 아직도 본전이 안 된다.

자연히 교재 연구도 이때 가장 많이 했던 것 같다. 학생이든 동료 교사든 막히면 나한테 가져왔고, 나는 대개 그 자리서 해결해 줄 수 있었다.

당시 고척고에 초등학교 교감 같은 교감이 있었다. 청소는 모든 학생이 나란히 나란히 해야 한다며, 청소 시간에는 전교를 돌아다니며 부리부리 눈과 우렁우렁 목소리(성악 전공)와 솥뚜껑 손으로 감시·감독한 교감이 있었다. 30대 초반의 신출내기가 거기에 대해 뭐라고 해 봐야, 입만 아플 터, 나는 그걸 나름대로 활용했다. 평등 교육을 실험하기로, 실천하기로 했다.

◇1학년 학생 12명을 정해 시간차 개인지도 시작

3학년 한 반에 나머지는 모두 1학년 수업에 들어갔는데, 똘똘한 1학년 학생 12명을 청소 시간에 개인지도해 주기로 했다. 그때는 토요일도 수업이 있어서 매일 두 명씩 불러서 살금살금 교감 눈을 피해, 한 주일 동안 공부한 것을 점검하고 질문을 받기로 했다. 아무래도 두 명을 지도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해서 점심시간에 한 명, 청소 시간에 한 명 이렇게 곧 변경했다.

학력고사 시절이었고 재학생은 개인과외도 학원 출입도 금지되던 때라, 강남이나 그 비슷하게 부유한 집안은 몰래바이트라고 해서 암암리에 개인지도를 받았지만, 고척동은 강북으로 통칭되던 C급 학교라 교실수업과 자율학습이 실력 향상의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내가 선발한 공부 선수 12명 중에는 아무도 개인지도 받는 학생이 없었다.

그때는 연합고사가 만만찮았다. 200점 만점에 서울의 인문고는 120점 내외가 커트라인이었다. 평준화의 최소 조건은 갖춘 셈이다. 그러니까 평준화는 일정 학력(學力) 이상의 학생들은 한 반에서 가르친다는 기본 전제 조건이 있는 것이다.

교문도 교정도 정든.... 가을이 되면 단풍으로 더 운치가 있었던 고척고등학교.
교문도 교정도 정든.... 가을이 되면 단풍으로 더 운치가 있었던 고척고등학교.

김영삼 정부에서 이걸 없애 버린 이후, 교육적 차원이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차원에서 이걸 없애 버린 이후, 학력의 하한선이 없어졌다.

평준화가 획일화로 전락한 것이다.

자연히 원래 의도와는 달리 맞춤식 교육 즉 과외가, 사교육이 갈수록 성행할 수밖에 없다. 그것도 부모의 재력과 학력(學歷)에 비례해서!

멀쩡한 학생들도 시간만 때우고 빈둥거리다가 100% 고교로 진학한다. 머리도 몸도 성인이 다 된 학생이 학력과 절제는 초등 수준, 욕망과 욕설은 말죽거리 깡패 수준이 되어, 자유와 권리만 주장할 줄 알지 그에 따른 책임과 의무는 쓰레기통에 내팽개치고 하수구에 쏟아 붓는다. 그들이 막 나가면 아무도 못 말린다. 친구도 부모도 교사도, 경찰도 검사도 대통령도 못 말린다. 무엇보다 학생 자신이 자신을 못 말린다.

연합고사에 합격한 학생은 전교 꼴찌가 100점 만점에 60점이니까, 그들 60명 가르치기가 요즘 학생 20명보다, 아니 10명보다 쉬웠다. 그들은 일단 말귀를 알아들었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높아지면, 대부분 똑바로 앉아서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졸린 눈을 부비며 억지로라도 똑바로 뜨려고 애썼다.

◇“강북의 180점은 강남의 190점과 안 바꾼다.”

고척고에서 자주 쓰던 말이다. 강북의 180점은 학교와 집에서 스스로 눈을 반짝이고 눈을 부비며 공부한 것이라 고스란히 자기 것이 되어 있었고, 잠재력이 덜 개발되어 발전의 소지가, 그렇지 않은 강남의 190점보다 더 컸던 것이다.

당시 강남에는 190점 이상이 한 학교에 적으면 100명, 많으면 200명에 이르렀지만, 강북에는 그런 학생이 10명이 채 안 되었다. 그러나 강북은 180점이면 이른바 하늘(SKY) 대학을 바라볼 수 있었다. 강남에선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강남에선 190점도 하늘 대학은 가물가물했던 것이다, 그저 희망사항(wishful thinking)!

청소시간과 점심시간에 나를 찾아온 학생들은 모두 180점이 넘었다. 그중 190점이 넘는 학생은 3명이었던 것 같다.

나는 그들에게 자기한테 맞는 교재를 하나씩 선택하라고 권고했다. 제일 많았던 것은 ≪성문종합영어≫였고, 당시 유행하던 ≪맥종합영어≫도 있었고, 과감하게 ≪영어왕도≫와 ≪1200제≫를 선택한 학생도 있었다. 한 학생만이 ≪성문기본영어≫를 부끄럽게 내밀었다. 그는 밑바닥까지 이해하고 깡그리 외워야 진도를 나가는 학생이었다.

수능 체제로 바뀌면서 지금은 서울대 합격생도 ≪성문기본영어≫를 제대로 공부하고 가는 학생이 드물다. 듣기 평가가 추가되어 귀는 많이 뚫렸고 말문도 많이 트였지만, 독해 능력은 형편없을 수밖에 없다. 더구나 영어가 2018학년도부터 절대평가가 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어 빈부 차이는 유례없이 벌어졌다.

참 재미있었다. 학생들 실력 느는 것이 눈에 선히 보였다. 나도 그들의 신선한 질문에 작은 지적 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떨 때는 나도 한참 생각해야 되는 질문도 있었다. 그러면 내가 늘 들고 다니던 ≪혼비 영영사전≫을 같이 찾아가며 해결해 줄 때도 있었다.

◇3학년까지 '쭉~' 함께, 의리 지킨 애제자들

이 학생들을 3학년까지 그대로 데리고 올라갔다. 수업에 들어가든 안 들어가든 3년간 그들은 하나같이 내 애제자로 의리를 지켜 주었다.

졸업하던 해, 여학생 1학년 딱 한 번 담임했을 뿐이어서 전원 남자인 이 학생들을 담임으로서 지도한 적은 없었지만, 이들 포함해서 한 스무 명이 우리 집에 왔다. 귤 한 상자와 사과 한 상자를 들고 왔다. 어찌나 식성이 좋던지! 밥도 웬만하면 두 공기를 싹싹 비우고 나서, 과일을 하나둘 먹기 시작하더니, 기어코 한 개도 남김없이 다 먹고 갔다.

그들의 성적은? 재수한 학생 포함해서, 서울대 법대 2명, 서울사대 수학과 1명(수석), 포항공대 1명, 연대 상대 3명, 고대 상대 1명, 성균관대 경제과 1명, 한양대 공대 1명, 지금 기억나는 것은 이 10명 정도이다. (2018. 5. 25.) 

csj@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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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루 2018-06-03 19:04:59
80년대 후반 저도 고등학교에 다니던 당시를 떠올리면서 선생님 글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 말씀처럼 지금의 일반고 교실 현실과 비교하면, 당시의 인문고는 60여명 정도의 한 학급 규모였지만, 수업 분위기는 지금과 천양지차를 느끼게 합니다. 우리나라의 교육정책이 계속 헛발질에, 뒷걸음질만 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아무튼 당시 저도 고척고등학교에 다녔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상상도 해 보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