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광
장석광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어떻게든 살아 도망가려는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단 한 놈도 살려 보낼 순 없다는 이순신! 임진왜란 최후의 결전이었다. 이순신의 죽음과 시마즈의 탈출! 그 뒤엔 명나라 스파이 사세용(史世用)이 있었다.

1593년 6월 나고야에서 명(明)과 일본의 강화회담이 진행되고 있었다. 도요토미가 강화조건을 제시했다. 명의 황녀를 일본의 후비로 보낼 것, 명은 일본과 교역을 재개할 것, 조선의 4개 도를 일본에 할양할 것이 골자였다. 이듬해 2월 심유경이 중국에 회담결과를 보고했다. 조공만 바칠 수 있게 해주면 일본으로선 감지덕지한다는 내용이었다. 전쟁을 빨리 끝낼 욕심에 도요토미가 제시한 강화조건을 심유경이 임의로 위조한 것이었다. 명 조정이 여기에 속아 강화를 맺는다면 한강이남 경기, 충청, 경상, 전라가 일본에 넘어가게 되는 위기의 순간이었다. 바로 이때, 나고야 회담의 실상을 폭로하는 사세용의 첩보보고가 조정에 도착했다. 회담은 결렬되었고, 심유경은 국서위조로 처형되었다. 사세용의 첩보 한 건이 임진왜란의 판세와 동아시아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사세용은 명 황제 직속 정보기관 ‘금의위’ 소속 무관이었다. 1593년 7월 조정은 심유경의 강화회담을 감찰하기 위해 사세용을 사쓰마 번(藩)으로 밀파했다. 허의후, 곽국안 등 귀화 중국인들이 사세용의 눈과 귀가 되어 주었다. 명나라 스파이 사세용이 한반도 최초의 분단 밀약을 저지했다. 귀국 후 사세용은 일본 밀파 중 입수한 정보자료로 <왜정비람(倭情備覽)>이라는 정보 보고서를 발간했다. 명·조선,일본의 정보공작활동에도 은밀히 관여했다. 임진왜란 최고의 격전 노량해전에서는 귀화 중국인 정보 네트워크의 중재로 사쓰마 번주 시마즈에게 도주로까지 열어주었다.

한반도 최초의 분단 밀약 저지, 이순신의 죽음과 시마즈의 탈출... 그 뒤에 명나라 스파이 사세용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세용 뒤엔 조선인 포로 염사근이 있었다. ‘나고야에서 우연히 만난 염사근은 우리가 세용과 함께 온 사정을 알고 편지 한 통을 세용에게 주라고 맡겼다.....신(복건순안 유방예)이 그 글을 보고는 모발이 위로 치솟아 즉시 적신(賊臣, 심유경 지칭)의 머리를 베어 사근(염사근 지칭)에게 사례하지 못함을 한탄하였습니다..... 사근의 이 원서를 봉하여 도찰원에 보내 대조하게 한다면 유경을 처벌할 죄안으로 삼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1594년 사세용의 정보라인이 조정에 보고한 기록이다. 명은 강화회담의 실상을 폭로한 염사근의 행적을 기록으로 남겼다. 염사근을 조선의 수재(秀才)로 칭했고, 지조 있는 인물로 소개했다. ‘왜적이 서울에 들어오자 사근이 누이동생을 왜장 장성(長成)에게 바쳤다..... 장성을 따라서 바다 건너 일본에 와서..... 말하는 것이 장황하고 허풍이 많았는데, 겉으론 고국을 생각하는 체하나 속으론 일본을 위하는 것이어서 그 정상이 실로 통탄스러웠다.....’ 1596년 일본 통신사 황신(黃愼)의 기록이다. 염사근에 대한 평가가 명과 조선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당시 조선은 전쟁 중에 사로잡힌 피로인(被虜人)에 대한 차별과 냉대가 만연했다. 황신도 예외가 아니었다. 2000년 대 초반, 중국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세용이 한국의 저명 학술지에 게재되고, 공영방송에서 특집으로 다뤄졌다 ‘조선에 온 중국 첩보원’이다. ‘중국판 007 사세용’ ‘중국도 믿으면 안 된다’ ‘일본은 이때부터 한국을 나눠먹을 생각했나?’ 반응이 뜨거웠다. 그러나 염사근에 대해선 한 마디도 없었다. 국군포로도 잊히는 판인데, 400여년이 넘은 염사근이야... 4월 28일, 이순신 장군 477회 탄신일을 맞아 객쩍은 소리 한 마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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