⑬복음을 빨리 전할 수 있는 이유

로스 목사, 서상윤 도움 받아 누가복음 조선말로 처음 번역
이수정, 한글 토 단 한문 복음서 사도행전·마가복음 등 출판

로스 목사가 서상윤의 도움으로 번역·출간한 누가복음 예수성교전서.
로스 목사가 서상윤의 도움으로 번역·출간한 누가복음 예수성교전서.

기독교와 한글의 재창제

윌리엄 그리피스는 ‘언문’ 즉 ‘한글’을 발견한 기독교 선교사들의 감동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선교사들을 뛸 듯이 기쁘게 한 것은 놀라운 보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열려라 참깨’를 외치며 수많은 보물을 훔친 알리바바도 언문 표음문자의 존재를 발견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보다 기쁠 수는 없었다. 아름다운 표음문자 체계는 수 백 년 전에 이미 발명됐다. 그러나 러시아의 피터 대제가 네덜란드로부터 가져온 수많은 발명품들이 수 백 년 동안 박물관 수장고 원래 박스에 포장된 채로 묻혀 있었듯이 언문도 마찬가지였다.

‘놀라움의 계단을 통해 낙원에까지 올라간’ 복음의 전령들은 이 문자를 이용하여 서간·소책자·책, 그리고 궁극적으로 살아있는 신의 말씀을 그 안에 모셨다. 조선이 일본에 비해 그토록 빨리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하나는 복음이 조선의 평민들에게 가장 익숙한 말과 글을 통해서 전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의 특권층 학자들은 언문을 배우기 쉽다는 이유로 ‘더러운 글’이라고 비판할지 몰라도 선교사들은 이 경멸의 대상이던 흙그릇을 천상의 보물을 담는 용기로 만들었다.’

물론 오랜 세월 폐기되었던 한글은 많은 한계를 안고 있었다.

‘언문과 조선의 일상어가 많은 제약을 안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 단어들을 섞지 않고는 학술적인 글을 쓸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어는 몇 세기 전 우리의 언어(영어)나 오늘의 일본어와 다를 바 없다. 심지어는 영국에서도 필사본 책의 시대에는 철자법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인쇄술이 도입된 이후에도 식민지 시대의 미국에서 볼 수 있듯이 철자법은 엉망이었다. 선교사들이 오기 전까지 조선어의 철자법과 띄어쓰기가 부재했다면 이들이 개정을 하고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 낸 후에도 많은 문제점들이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 선교사들이 ‘언문’을 적극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한글의 잠재력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조선은 복음의 전령들이 도래하기 전까지 자국의 문학을 갖고 있지 않는 나라들 중 하나였다. 이는 결코 외국 학자들을 우쭐하게 만들려고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니다. 조선어로 번역된 성경은 조선 사람들의 정신과 가슴을 뛰게 했을뿐 아니라, 그 전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유 체계에 숨을 불어넣었고 말과 글의 새로운 기준을 갖춰 진정한 의미에서의 국문이 태동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1) 로쓰와 최초의 한글 성경

최초로 한글을 이용하여 성경을 번역한 사람은 존 로쓰였다. 스코틀랜드 서북쪽의 작은 어촌에서 태어난 로쓰는 글래스고우 대학과 에딘버러 장로회신학대학(Theological Hall, Edinburgh)을 졸업한 후, 1872년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 해외선교본부의 중국 선교사로 오늘의 랴오닝성 잉커우(營口)에 파견된다. 그 후 선양(瀋陽)으로 옮겨 1889년 ‘동문관 교회’를 설립한다.

로쓰는 잉커우 거주 당시인 1873년 가을 전도지 탐색을 위해 동만주를 여행한다. 이때 그는 조선-만주 국경의 퉁화현(通化縣)의 ‘고려문(高麗門)’에서 중국인들과 장사를 하기 위해 그곳에 와 있던 조선 사람들을 처음 만난다. 58 당시의 조선 사람들은 서양인들을 극도로 기피했에 로쓰는 조선에 대해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그러나 ‘조선 사람에 대해 관심이 더욱 커진’ 로쓰는 이듬해 다시 조-만 국경지대를 찾는다. 조선에 대해 배우고 싶었던 로쓰는 자신에게 조선 말을 가르쳐 줄 사람을 찾았고 이응찬을 만난다. 로쓰는 1875년부터 이응찬의 도움으로 동료 선교사 존 매킨타이어(John Mac- 존 로쓰Intyre, 1837 ~1905)와 누가복음을 조선어로 번역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이응찬은 기독교로 개종한다.

1878년에는 서상윤(徐相崙, 1848~1926)·서상우(서경조, 徐景祚,1852.12.14.~1938.7.27.) 형제가 만주에 장사를 하러 간다. 하지만 돈이 다 떨어진 서상윤은 장티푸스에 걸려 자포자기한 상태였다. 로쓰와 매킨타이어는 서상윤을 잉커우의 선교 병원에 데려가 치료해 준다. 서상윤은 1879년 로쓰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는다.

‘이 권서인 서상윤은 개혁교회 신앙에 입교한 최초의 조선인 개종자이다. 그는 나와 함께 몇 년 전에 ‘누가복음’을 조선말로 번역하였고, 번역이 끝나자마자 나에게 세례를 받겠다고 말했다.’

동생 서경조는 조선으로 귀국하지만 서상윤은 로쓰와 함께 선양으로 돌아가 조선어 성경 번역과 출판 사업을 돕는다. 서상윤은 번역뿐 아니라, 목판을 깎아 식자 작업까지 한다. 로쓰는 1882년 가을 심양의 ‘문광서원’에서 ‘예수성교 누가복음 전서’와 ‘예수성교 요한복음 전서’를 출판한다. 이 과정에서 로쓰는 한글의 탁월함을 깨닫는다.

‘조선의 글자는 현존하는 문자 가운데서 가장 완전한 문자다.’

로쓰는 이어 서상윤·김진기·이응찬·백홍준 등의 도움을 받아 1883년에는 ‘제자행적’과 ‘예수 성교 전서 말코 복음’을, 1884년엔 ‘예수 성교 전서 마대복음’을 발간한다. 이때까지 로쓰·서상윤 등이 번역한 한글 성서는 1만5천부 넘게 팔린다. 1887년엔 신약성서 전부를 ‘예수 성교 전서’라는 제목 하에 출판한다.

서상윤은 한글 성서가 출판되자 권서인(勸書人, colporteur)으로 조선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전교를 하다가 황해도 장연군 송천(속칭 솔내)에 정착한다. 솔내에는 서상윤 주도로 조선 최초의 장로교회가 설립된다. 동생 서경조는 1887년 한양에서 언더우드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1907년 다른 6명과 함께 목사 안수를 받음으로써 조선 최초의 장로교 목사가 된다.

로쓰는 그 후에도 ‘한영문전입문(韓英文典入門), Corea, Its History, Manners and Customs(한국지: 그 역사, 생활, 관습)’ 등의 책들을 출간한다.

2) 이수정의 한글 성경

한글 성서 번역 작업은 일본에서도 진행된다. 이수정은 1882년 9월 29일 박영효가 이끄는 수신사의 비공식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간다. 일본에서는 당시 일본 기독교의 거물로 아오야마 가쿠인 대학교·도시샤 대학교 등 설립에 앞장 섰던 츠다 센(津田仙, 1837.8.6.~1908.4.24.)을 찾는다.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하여 츠다 센에게 근대 농법을 배워온 안종수(安宗洙, 1849~1896)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이수정 역시 근대 농법을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츠다 센은 훗날 일본 최초의 여자 대학교인 츠다주쿠 대학을 설립한 친 딸 츠다 우메코(津田梅子, 1864.12.31.~1929.8.16.)를 이와쿠라 사절단 일원으로 미국에 보내기도 한 인물이다. [츠다 센에 대해서는 제 2권 제 8장 ‘신사유람단과 본격화되는 일본 배우기’ 참조. 츠다 우메코에 대해서는 제 2권 제 2장 ‘이와쿠라 사절단의 여정’ 참조]

이수정은 츠다 센의 집에서 한문으로 된 ‘산상수훈’ 족자를 읽고 감명받아 츠다로부터 기독교 교리에 대한 설명을 듣고 한문 성경을 받는다. 그후 츠다는 이수정을 쯔기츠(露月町) 교회의 야스카와 토오루(安川 亨) 목사에게 소개한다. 1882년 크리스마스 예배에 참석한 이수정은 회심 체험을 하고 회중들 앞에서 신앙 고백을 한다. 그리고 1883년 4월 29일 도쿄 로게츠쵸교회에서 미국 선교사 조지 녹스(George W. Knox, 1853~1912)에게 세례를 받는다.

세례 후 이수정은 1883년 6월 한문 신약성서에 조선어 토를 단 ‘현토 한한 신약성서’와 국한문 혼용체로 ‘신약마가복음서언해’를 번역하여 1885년 2월 요쿄하마에서 미국 성서공회를 통해 출판한다. 또 ‘누가복음서를 번역하고, 매클레이 목사의 요청으로 ‘감리교교리문답서’를 번역한다. 1884년엔 조선어 토를 단 한문복음서 일부분과 ‘사도행전’ 1천 부가 출판되고, 1885년 초엔 한글 번역 ‘마가복음’이 인쇄된다.

언더우드가 조선에 건너올 때 갖고 온 성서는 바로 이수정이 번역한 신약성서의 일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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