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수
김태수

4.29 폭동이 일어난 지 30년이 지났다. 4.29 폭동으로 한인사회가, 한인인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계기가 됐다. 지난 30년간 숱한 사건들과 발전 끝에 오늘날 한인사회는 미국에서 역동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중요한 분수령이 된 4.29 폭동 30주년을 맞아 다시 한번 당시를 회상하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새겨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1992년 4월 29일 저녁 무렵에 로드니 킹 구타 경찰들의 판결이 내려진다는 소식으로 로스엔젤레스(LA)는 물론 미국 전역에서 관심이 모여졌다. 이전부터 근 1년 동안 경찰들의 흑인 무차별 구타 사건 보도는 계속되었고, 두순자 여인의 가게 흑인 소녀 사망 사건도 집중 보도되었다.

주류 언론이, 전혀 관련 없는 두순자 여인 사건을 로드니 킹 사건과 연관시켜 의도적으로 편파 보도한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분명히 주류 언론이 책임을 져야 한다. LA타임스도 몇 년 전에 이 점에 대한 과오를 인정하고 사죄 글을 발표한 적이 있다. 우리가 힘이 없이 얼마나 주류 언론에 이용당하였는지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30년 전, 1992년만 해도 한인사회는 현재의 막강한 파워가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연방 하원의원도 한 명 없었고 미국 정치계에서 우리를 대표해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1992년 당시 필자는 25세였다. 29일 오후 4시쯤 로드니 킹 구타 경찰들에 대한 무죄 판결이 내려지고 사회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5시, 6시쯤에 LA 쪽 하늘이 검게 타올랐다. 전쟁에서나 볼 수 있는 검은 연기로 온통 하늘이 뒤덮이기 시작한 것이다. 필자는 오렌지 카운티 애나하임에 살고 있었는데, 거기까지 방화나 약탈은 없었다. 그날 밤 내내 LA 쪽 하늘은 검게 타올랐고, TV와 라디오 방송은 온통 폭동 소식뿐이었다. 라디오코리아에서 특별방송으로 약탈 현장을 생중계했다.

피해 한인들이 라디오코리아로 계속 전화로 도움을 요청했고, 라디오 앵커들은 생방송으로 한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한 한인 가게로 가서 도와달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이런 생중계 라디오 방송이 며칠 계속됐다. 그야말로 라디오코리아가 전쟁통의 통신지휘센터로 변한 것이다. 당시 한인들은 라디오코리아에 24시간 귀기울이며 며칠 동안을 보냈다. "폭도들이 몰려오고 있어요"라고 울부짓는 한인들의 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마치 임진왜란 때 권율장군의 행주산성 전투와도 같은 상황이었다. 이것이 우리가 겪은 4.29폭동이다.

밤새도록 라디오코리아에 귀기울이며 밤을 새운 다음날 아침, 필자는 친구와 함께 트럭을 타고 LA 한인타운으로 갔다. 한인타운 진입로인 웨스턴가는 이미 사방이 다 불타있었고, 여전히 불길에 휩싸인 곳도 있었다. 하지만 경찰이나 소방차, 주 방위군은 전혀 볼 수 없었다. 경찰이 타운을 버렸고 타운은 무법천지였다. 사방에서 상점 약탈은 계속되었다. 당시 한인 소유 2천3백곳이 불타고 약탈당했으니 한인타운은 그야말로 전쟁으로 없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인들이 모여 살고 사업을 일군 LA 한인타운은 단 하룻밤 사이 잿더미가 된 것이다.

이후 30년이 흐르면서 폭동 당시 피해를 입은 한인들이 정부로부터 피해보상을 받았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하룻밤 사이에 가게가 잿더미로 변한 한인들은 캘리포니아를 떠나 워싱턴 주, 콜로라도, 오레곤, 조지아 주 등으로 새로운 삶을 찾으러 떠났다. 4.29 폭동 후 흑인 밀집 지역인 사우스 센트럴의 대부분의 한인 소유 상점들은 이 지역을 떠났고, 한인사회는 전체적으로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폭동으로 인해 물리적, 정신적 피해를 입었으나 한인들은 다시 삶을 개척했다. 최근 한인계 은행 뱅크 오브 호프의 연구자료에 의하면 그동안 한인 경제규모는 50배 가까이 증가하였다. 이 사건은 또 한인사회가 주류사회에 적극 참여하고 진출하게 되는 계기도 되었다.

폭동 후 김창준 의원이 한인으로서는 사상 처음 연방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실로 중요한 한인사회의 역사적 이정표였다. 한인들의 정계 진출은 계속 이어져 현재는 미셸 박 스틸, 영김, 앤디김, 매레 스트릭랜드 등 4명이 연방 하원에 진출해 있다.

미국의 한인 역사에서 4.29 폭동은 그 중심에 있으며 미국 내 한인이라는 아이덴티티는 4.29 폭동으로 시작된 것이다. 1960년 후반 한인 이민이 시작됐고 이 폭동으로 인해 미국 내 한인 사회가 정립되었다. 또 본격적인 주류사회 진출도 이 폭동에서 시작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당시 폭동 때 상점 지붕에 올라 가 총을 들고 폭도들로부터 타운을 지킨 지붕 위의 한인들, 루프탑 코리안. 사회의 회오리 속에서 한인들은 우리의 정체성을 정립하였고 새로운 발전의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피해자에서, 이제 그 피해를 딛고 일어선 이 사회의 지도자가 되는 30년을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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