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는 5·16을 낳고, 5·18은 6·15를 낳고(上)
6·25는 5·16을 낳고, 5·18은 6·15를 낳고(上)
  • 최성재
  • 승인 2018.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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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 교육 평론가
스탈린의 길을 따라 간 모택동과(왼쪽) 그에게 중국이라는 큰 떡을 안겨준 일본의 항복문서 조인식. 결국 미국이 모택동의 꿈을 실현시켜준 셈이 됐다.
스탈린의 길을 따라 간 모택동과(왼쪽) 그에게 중국이라는 큰 떡을 안겨준 일본의 항복문서 조인식. 결국 미국이 모택동의 꿈을 실현시켜준 셈이 됐다.

[6·25의 핏속에서 잉태된 5·16과 와신상담 한강의 기적은 5·18의 붉은 양탄자 위로 걸어와 민족화해의 신성모독 옥좌에 앉은 6·15에 의해 한 줌의 재로 변하기 직전이다.]

◇美-日 태평양전쟁의 어부지리로 중국을 통일한 모택동

1945년 8월 15일 미국이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으로부터 무조건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아시아는 유사 이래 처음 맞는 새 질서를 맞이했다. 무엇보다 무주공산(無主空山) 중원에서 100여년 만에 처음으로 더 이상 외세 개입을 걱정하지 않고, 장개석과 모택동이 통일의 진검 승부를 펼칠 수 있었다.

중원의 100년 천하대란은 1949년 장개석이 대만으로 탈출함으로써 완결되었다. 해군이 없었던 모택동은 발을 두어 번 구르고 자금성에서 천자(天子)의 대관식을 가졌다.

모택동도 맥아더가 동조(東條 도죠)의 무릎을 분질러버리지 않았으면 통일은 꿈도 못 꾸었다. 만주의 관동군과 중원의 일본 원정대는 장개석의 계란과 모택동의 모래에게 바위요 철벽이었다.

제갈공명이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며 소수의 날랜 병력을 이끌고 조조의 백만 대군을 주머니 속의 공깃돌처럼 갖고 놀았다는 것은 역사가 아니고 희망 섞인 소설이듯이, 모택동이 1만2000km 대장정 기간 동안 16자 전법(戰法)으로 마치 장개석의 대군을 전투 때마다 골탕 먹였다는 것도 어디까지나 중국공산당이 지어낸 신화이지 역사가 아니다.

대장정이 끝나자 30만 군대가 고작 3만 명밖에 안 남았다. 더군다나 모택동이 실지로 거느린 군대는 패잔병 8000명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은 그가 패배에 패배를 거듭하여 대파국(catastrophe) 일보 직전에 있었던 것이다.

모택동을 살려 준 것은 역설적으로 일본이었다. 장개석 군대가 아무리 부패했다고 할지라도 최후의 일격을 가하면 모택동은 초패왕 항우가 될 신세였지만, 때마침 일본이 풍신수길의 350년 해묵은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대작전을 개시했던 것이다.

닉슨 미국 대통령은 1972년 중국을 방문해 살아있는 '대륙의 신'인 모택동을 만났다. 이후 미국과 중국은 외교관계의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
닉슨 미국 대통령은 1972년 중국을 방문해 살아있는 '대륙의 신'인 모택동을 만났다. 이후 미국과 중국은 외교관계의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

1937년 일본군이 만주에 이어 중원을 장악하러 나섰던 것이다. 현대전은 군인의 압도적 숫자나 맨손으로 총알도 날려버리겠다는 불퇴전의 정신력이 아니라 과학기술(기관총 한 정이면 5000명을 상대할 수 있음)과 물자(미국이 독일과 일본을 동시에 물리친 가장 큰 요인은 압도적인 물량 공세)이기 때문에, 장개석과 모택동은 어쩔 수 없이 다시 손을 잡았지만, 아시아의 전쟁기계 일본군에게 도무지 상대가 안 되었다.

일단 쫓겨난 후에 살살 약을 올리는 게 고작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작전이었다. 모택동은 일본과 싸우는 척하면서 세력을 급격히 늘려서 1937년 9만 명의 군대를 1945년 91만 명으로 불렸다.

미국은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인도 아삼의 레도(Ledo)에서 중국의 곤명(昆明)에 이르는 도로를 닦고 히말라야의 하늘을 가로질러 도합 80만 톤의 무기와 식량을 중국에 공급했다. (소련에게는 450만 톤을 공급했다.)

인류 최대의 작전이라는 노르만 상륙에 퍼부은 물자가 57만 톤(차량 15만 대)이었으니까, 그 양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은 고문단을 파견하여 36만 명에 이르는 알파 부대를 만들어 이들을 일본군 못지않게 현대화시켰다.

이들의 전술과 화력이 곤명을 탈취하러 몰려온 일본군을 어렵지 않게 물리침으로써, 더군다나 맥아더가 필리핀을 탈환하여 거기서 바로 중국으로 물자를 공수할 수 있게 됨으로써, 일본군이 마침내 보급선을 단축하기 위해 양자강과 북경 사이로 집결하게 만들었다.

모택동의 승리로 중국 공산당이 베이징에 입성하고 있다.
모택동의 승리로 중국 공산당이 베이징에 입성하고 있다.

미국에게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는 바람에 모택동이 어부지리의 가장 큰 몫을 취했다. 미군의 엄중한 감시 하에 일본군이 물러가자마자, 그 외곽에 머물던 모택동이 중원의 노른자위인 양자강 이북과 북경 사이에 재빨리 똬리를 튼 것이다. 미국이 퍼준 80만 톤의 무기와 보급품과 식량과 의약품도 속속 모택동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어쨌거나 곧 마왕에게 7천만이 학살당하거나 굶어 죽을 운명이었지만, 그 당시는 민심을 얻은 덕분이었다. 장개석과 싸울 때는 지주를 몰아내고 농민에게 나눠준 농지는 공산화되자마자 인민공사란 이름으로 몰수하여 농민을 깡그리 국가 농노로 전락시킴으로써 모택동은 농민을 가장 악랄하게 배반했다.

중국의 농민은 지금도 경작권만 있을 뿐 소유권이 없어 가족이 전원 고향을 떠나는 순간 빈털터리가 되기 때문에 도시에 일하러 나가도 자녀나 아내나 부모는 고향에 남겨 둘 수밖에 없다.

◇미국의 입김으로 만주를 중공에 넘겨 준 스탈린의 몽니: 6·25 기습남침

스탈린은 화가 하늘에 닿았다. 러일전쟁 패전으로 빼앗겼던 만주를 잽싸게 접수했지만, 미국이 일본에 원자탄을 터뜨리는 것을 보고 바로 달려가 토끼 몰이하듯이 관동군을 사로잡고 접수했지만, 모택동의 중원 통일 기념으로 바로 돌려주어야 했던 것이다.

미국과 영국과 인도의 新3국 간섭 때문이었다.

대신 스탈린은 몽골과 북한을 접수하고 돌려주지 않았다. 스탈린은 북한의 청년을 모아 4개 사단을 만들었다. 최고의 무기를 쥐어 주고 5년에 걸쳐 맹훈련시켜 강군으로 만든 다음, 스탈린의 백골난망(白骨難忘) 은총에 개처럼 말을 잘 듣는 소련군 대위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모택동도 통일하자마자 스탈린의 제의에 따라 얼씨구나, 중국 공산당에 가담하여 국민당과 싸운 역전의 용사 조선인으로 구성된 3개 호랑이 사단을 김일성에게 돌려주었다. 이들 7개 사단에게 무기는 스탈린이 넉넉히 대 주었다. 특히 한국에는 한 대도 없었던 탱크 242대! 그리고는 소련군은 싹 빠져 나갔다.

평화! 자주!

훈련도 무장도 안 된 오합지졸을 두고 순진하게도 트루먼은 이에 화답하여 미군을 철수했다.

평화! 자주!

트루먼은 친절하게 1950년 1월 애치슨라인까지 한반도 바깥으로 싹 그어 주었다. 다행히 트루먼은 김일성이 스탈린과 모택동을 등에 업고 남침하자 속았음을 바로 깨닫고 미군을 한반도로 급파했다.

1951년 3월에서 1953년 7월 사이에 한반도에서 미국이나 중공이나 서로 한 뼘의 땅도 빼앗지 못하고 팽팽하게 맞서서 무익한 살상을 계속했다. 스탈린이 뒤에서 계속 물자를 대 주며 둘 다 망하라고 악마의 미소를 지으며 싸움을 부추겼기 때문이다. 그가 죽자 바로 미완의 평화가 찾아왔다.

스탈린의 의도와는 달리 미국은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다. 도리어 공산당의 실체를 똑똑히 알았다. 평화 무드에서 깨어나 5대양을 확실히 장악했다. 또한 시장경제는 공전의 호황을 거듭했다.

모택동을 모방하려는 시진핑.
모택동을 모방하려는 시진핑.

중국도 약해지지 않았다. 똘똘 뭉쳤다. 미국과 소련 누구도 친구가 아니라는 것을 굳이 중국의 인민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모택동은 6·25 후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1억 정도는 언제든지 잃을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연안의 산업시설을 모조리 머나먼 사천(四川)으로 뜯어갔다. 죄 없이 수천만이 맞아 죽고 죄 없이 수천만이 굶어 죽었지만, 공산당에 맞서는 자는 한 줌도 안 되었다.

◇군사력과 사상으로 신의 반열에 올라선 모택동

모택동은 황제를 넘어 신의 반열로 올라섰다. 이건 4000년 중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중국의 새 통일 왕조도 여느 왕조처럼 군사란 외적인 강제력만으로는 절대 유지될 수 없었다. 반드시 사상이란 내적인 응집력이 있어야 했다. 이 사상은 칼이 아니라 붓을 든 사람만이 제공할 수 있었다.

새 황제는 필수적으로 새 왕조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사상가를 영입해야 했다. 때로는 통일의 일등 공신인 장군을 내쫓고 사상가를 영입해야 했다. 위대한 사상가가 새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함으로써, 비로소 새 왕조는 국민으로부터 자발적인 충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모택동은 군사력만 장악한 게 아니라 바로 이 사상도 지배했다. 그 자신이 당대 최고의 철학자였다. 옳든 그르든 누구도 그와 논쟁해서 이길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냥 황제가 아니라 신의 반열에 올라선 것이다. 일찍이 레닌이 그런 위치에 잠시 올라선 적이 있지만, 일찍 죽음으로써 모택동과 같은 신의 반열에는 오를 수 없었다.

중국의 새 황제는 미국과 소련 두 제국주의에 맞서 원자탄을 개발하고(1964), 인공위성을 쏘아올린(1970) 것으로 초근목피의 생활은 감수할 만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반인반신(半人半神) 마왕 모택동이 죽고 나서야 비로소 중국은 터무니없는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났다.

불과 30년 만에 군사대국 러시아와 경제대국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 강대국으로 올라섰다. 미국의 경제 호수 5대양을 아시아의 4룡처럼 공짜로 사용한 덕분이었다. (2011. 6. 30.) (2018. 6. 5.) <내일 下편에 계속>

csj@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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