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하와이에 정착하기까지

해리스 감독 주선으로 동경 방문
1912년 5월 감리교 세계총회 참석
6월 우드로 윌슨 주지사 가족 방문
12월 박용만이 먼저 하와이 도착
1913년 2월 이승만 하와이에 정착

이승만을 아낀 우드로 윌슨의 가족들. 앞줄 검은색 옷을 입고 의자에 앉은 두 사람이 윌슨 부부다. 뒷줄 왼쪽 여성이 첫째 딸 Margaret, 가운데 걸터앉은 여성이 셋째 딸 Eleanor, 그리고 오른쪽 흰옷을 입고 서 있는 여성이 둘째 딸 Jessie다. 특히 둘째 딸 제시는 유학 시절부터 이승만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
이승만을 아낀 우드로 윌슨의 가족들. 앞줄 검은색 옷을 입고 의자에 앉은 두 사람이 윌슨 부부다. 뒷줄 왼쪽 여성이 첫째 딸 Margaret, 가운데 걸터앉은 여성이 셋째 딸 Eleanor, 그리고 오른쪽 흰옷을 입고 서 있는 여성이 둘째 딸 Jessie다. 특히 둘째 딸 제시는 유학 시절부터 이승만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
류석춘
류석춘

박사를 마치고 고국 땅에 돌아온 이승만은 YMCA 일을 하던 중 일제가 만든 ‘105인 사건때문에 19123월 다시 미국으로 도피해야 했다. 이승만은 그로부터 1년간 미대륙 이곳저곳을 정처없이 떠돌다 결국 19132월 하와이에 정착한다. 이승만 나이 37살 때의 이야기다.

고국 땅을 떠나는 이승만의 마음은 심란했다. 19125월 한 달 동안 미국 미니아폴리스에서 4년에 한 번씩 개최되는 감리교 국제총회에 한국 평신도 대표로 참석한다는 명분이 있긴 했지만, 사실은 일본의 체포를 피하기 위한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이 회의를 마치면 어디로 가야 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는 불안정한 도피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일본에 있던 동북아 감리교 총책 해리스(Merriman C. Harris) 감독이 일본 정부와 교섭하여 이승만의 여권을 마련해 준 일이었다. 이 여권 덕택에 이승만은 미국으로 가는 도중 잠시 일본에 들러 동경 YMCA 회원들과 교류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마침 이승만의 옥중 동지 김정식이 재일 한인 YMCA 총무를 맡고 있어 도움이 되었다. 조소앙(조용은) 등 동경의 한인 유학생들은 이승만의 방일을 열열히 환영했다.

2주에 걸친 일본 방문 일정을 마치고 이승만은 해리스 감독과 함께 1912410일 일본을 떠나 미국으로 향했다. 회의가 시작되는 51일 직전 미니아폴리스에 도착한 이승만은 529일 회의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며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쳤다.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는 먼저 약소민족의 해방이 필요하며, 아시아의 평화를 위하여선 먼저 한국의 자주독립이 있어야 한다. 기독과 모든 교회의 정신은 마땅히 이러한 평화 옹호에 있어야 할 것이며 세계의 기독교는 이 일을 위해서 단결해야 한다.” 서정주가 1949년 처음 발간하고 1995년 중간한 우남이승만전(화산 문화기획: 207) 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승만의 주장과 상관없이 이 회의는 한국 감리교회를 독립적으로 유지하기보다 중국이나 일본의 감리교회와 통합하는 방안을 중요한 의제 중 하나로 다루었다. 이승만은 한국 감리교회의 독립성을 주장하며 통합에 반대했지만, 일본과 한국을 하나로 묶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막지 못했다. 이승만은 더욱 우울해졌다(유영익, 1996, 이승만의 삶과 꿈중앙일보사: 96).

회의를 마친 이승만은 당시 뉴저지 (New Jersey) 주지사로 진출해 대략 한 달 후인 625일로 예정된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 지명을 노리고 있는 모교의 전 총장 우드로 윌슨 (Woodrow Wilson: 1856~1924) 을 방문하는 일정을 이어갔다. 프린스턴 재학시절 가까이 지내던 윌슨의 둘째 딸 제시(Jessie Wilson) 의 적극적 협조 덕분에 시 거트’(Sea Girt) 에 있는 주지사 별장을 찾은 이승만은 윌슨은 물론 그의 가족과 반가운 상봉을 할 수 있었다.

이 방문에서 이승만과 윌슨이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 분명히 확인해 주는 객관적 사료는 없다. 다만 앞에서 소개한 서정주의 이승만 전기는 이 대목에 관해 다음과 같은 구절을 전하고 있다(서정주, 1949 [1995]: 208-209).

“...[이승만] 한국 해방을 세계에 호소하는 성명서를 만들고자 하니 거기에 꼭 좀 동의 서명을 하여 달라.... [윌슨] 미국 대통령 아닌 나 한 개인으로서는 거기에 물론 서명해 드리고도 싶소...그렇지만 미국의 정치를 위해서는 아직도 내가 당신의 성명에 도장을 찍을 때는 아니요. 그러나 인제 우리가 같이 일할 때는 반드시 올 것이니 그것을 믿으시오. 그렇잖아도 나는 벌써부터 당신의 조국 한국을 포함한 모든 약소민족 국가들의 일을 생각해 오고 있는 중이오.”

유영익(1996: 98) 은 이와 같은 이승만과 윌슨의 밀당’(밀고 당기기) 이 세 번이나 반복되었음에 주목한다(1912619, 630, 76). 이로부터 우리는 다음 세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 37살 청년 이승만의 집요한 요청을 56살 미국 대통령 후보 윌슨은 매우 정중히 거절했다. 2) 이와 같은 밀당을 집으로 방문해서 세 번이나 반복할 정도로 이승만은 윌슨과 친밀했다. 3) 이승만과 밀당을 하는 사이에 윌슨은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자리를 거머쥐었다. 앞으로 누구도 넘보지 못할 이승만의 정치적 자산은 이렇게 쌓여갔다.

이승만과 박용만(오른쪽). 옥중 의형제였던 두 사람은 독립운동 노선을 두고 엄청난 갈등을 겪는다.
이승만과 박용만(오른쪽). 옥중 의형제였던 두 사람은 독립운동 노선을 두고 엄청난 갈등을 겪는다.

3주 남짓한 기간의 은사 방문을 마친 이승만은 뉴욕주 북쪽 실버 베이 (Silver Bay)에 있는 해외선교사 휴양소를 찾아 여름 휴가를 즐겼다. 그후 이승만은 옥중 동지 박용만을 만나기 위해 네브라스카(Nebraska) 해스팅스(Hastings)를 찾았다. 박용만은 그곳에서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었다.

1912814일 해스팅스에 도착한 이승만은 박용만과 5일간에 걸쳐 개인적, 민족적 여러 현안을 의논한 끝에 하와이로 건너가 장기적인 독립운동의 거점을 함께 만들기로 약속했다. 독자들도 알다시피 박용만은 이승만의 아들 태산과 함께 이승만의 옥중 원고 독립정신을 미국으로 가져온 장본인이다. 그만큼 두 사람은 가까운 사이였다.

박용만과 헤어진 이승만은 뉴저지주 캄덴(Camden) YMCA에 머물면서 신변을 정리하고 1913110일 동부를 떠나 시카고 및 LA를 거쳐 11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하와이행 여객선 시에라(The Sierra) 호에 올랐다. 마침내 191323일 이승만은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두 달 먼저 와 있던 박용만의 주선으로 엄청난 인파의 하와이 교민이 부두에서 이승만을 환영했다.

이승만의 하와이 정착에 관해서는 연구자 사이에 일부 오해가 있다. 많은 연구자가 이승만이 하와이에 간 까닭은 옥중동지 박용만이 하와이에 먼저 정착해 이승만을 초청했기 때문이라 설명한다(정병준, 2005, 우남 이승만 연구역사비평사; 이한우, 1996, 이승만 90년 거대한 생애조선일보사). 그러나 앞서 밝혔듯이 두 사람은 네브라스카 해스팅스에서 함께 의논해서 같이 하와이로 갈 것을 결심했다.

그 결과 각자 신변을 정리하고 하와이로 향했다. 공교롭게도 박용만이 이승만보다 두 달 앞서 191212월 초 하와이에 도착했다. 이어서 두 달 후 이승만이 하와이에 도착했다. 하와이에 도착한 날짜만을 보고 많은 연구자가 박용만이 이승만을 하와이로 초청했다고 오해한다. 그러나 두 달 먼저 하와이에 정착한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본토에서 불러들여 하와이에 정착시키는 일은 당시 사정을 고려할 때 불가능한 일이다.

앞서도 밝혔지만 두 사람은 이미 19128월 같이 하와이로 갈 것을 해스팅스에서 약속했다(유영익, 1996: 100). 미국 교민들 사이에 이미 널리 알려진 독립운동가로 인정받고 있던 두 사람이 하와이에 정착할 것을 결심한 이유는 당시 그곳에 한인 교포가 가장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형호제하며 가깝게 지내던 두 절친은 하와이에서 독립운동 방식을 놓고 엄청난 갈등을 겪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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