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論] 개인윤리가 국가윤리를 압도하는 나라
[時論] 개인윤리가 국가윤리를 압도하는 나라
  • 최성재
  • 승인 2018.06.1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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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論// 최성재 교육 문화 평론가

[한국은 사회윤리나 국가윤리보다 개인윤리가 한층 중요시되는 나라,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봉건 씨족사회를 벗어나지 못한 후진국도 한참 후진국이다.]

윤리는 적용 범위에 따라 개인윤리와 사회윤리와 국가윤리로 나눌 수 있다. 동방예의지국의 적자(嫡子) 한국은 특이하게 윤리라고 하면 대부분 개인윤리를 가리키고 그걸 당연하게 여기는 후진적 퇴행적 수구적 국가다.

민주와 평화, 자유와 평등, 인권과 복지 등 근대 국가의 개념이 사무라이의 칼을 분지른 보안관의 총 덕분에 붓의 나라에 후천개벽(後天開闢) 해일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속속들이 명분사회가 아니랄까, 그러나, 한국인은 그걸 어떤 국민보다 좋아하여 입에 코에 귀에 주렁주렁 달고 살지만, 이 아름다운 말들은 기껏 조선중기 이후처럼 개인 또는 가족이나 패거리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원래 그랬을까? 아니다! ≪삼국사기≫의 한 구절을 보자.

“우리 집 물맛은 여전하구나(吾家之水 尙有舊味)!”

김유신(金庾信) 장군의 말이다. 때는 서기 645년(선덕14) 3월!

김유신은 상장군(上將軍)으로서 644년 9월부터 백제와 국가의 명운을 건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연전연승(連戰連勝), 645년 1월에 개선하던 중 미처 왕도 배알하지 못하고 다시 왕명을 받자와 말머리를 돌려 최전방으로 달려갔다. 그사이 백제가 침공했던 것이다.

이번에도 연전연승, 3월 드디어 왕을 알현하고 6개월 만에 꿈에도 그리던 집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온 집안 식구가 대문 밖까지 나와서 설레는 가슴으로, 바싹바싹 타는 입으로, 안타까운 까치발로, 기린의 그것처럼 긴 학의 고개로, 이제나 저제나 낭군을 기다리고 아버지를 기다리고 큰아버지를 기다리고 주인어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선덕여왕의 명령을 받들고 사자(使者)가 버번쩍 번개처럼 날아온다.

“장군님, 장군님, 김유신 장군님, 백제 저 문디들이 또 쳐들어왔심더!”

김유신은 본가 앞으로 지나가면서도 눈길 한 번 안 돌린다. 천리마의 큰 걸음으로 오십여 보를 더 지나쳐서야, 가족의 얼굴들이 희미해져서 누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할 정도가 되어서야,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장수(*漿水) 한 바가지 떠오게 한다. 이때 말안장 위에서 한 말이 위의 저 유명한 말이다. 그리고는 보라, 우리 김유신 장군, 두 발로 힘차게 박차를 차고 전방으로, 눈물을 들킬세라, 쏜살처럼 달려간다. 두두두두!

(*漿水: 오래 흠씬 끓인 좁쌀 미음. 또는 그 웃물. 달고도 새콤한 맛이 있어 목마름을 덜어 주며, 한약을 달이거나 먹을 때 쓴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국가의 윤리를 중시한 신라 장군 김유신(왼쪽)과 전투 중에도 개인의 효를 중시하여 3년 상을 치르러 간 집으로 돌아간 이인영 의병장.
국가의 윤리를 중시한 신라 장군 김유신(왼쪽)과 전투 중에도 개인의 효를 중시하여 3년 상을 치르러 집으로 돌아간 이인영 의병장.

1907년, 일제(日帝)는 다 합해야 3천 명도 채 안 되던 조선의 군대를 해산한다. 이에 조선 13도에서 의병이 주로 괭이와 낫과 도끼와 죽창을 들고 이른 봄 들불같이 일어난다. 한양으로 속속 집결한다. 총사령관은 이인영(李麟榮), 동대문 근방에서 막 작전을 개시하려는데, 급보가 전해진다.

“장군님, 춘부장이 돌아가셨답니다!”

이에 이인영은 찢어질 듯 군복을 확 벗어던지고 귀신처럼 머리를 풀어헤치고, 남의 집 귀한 애 떨어질라, 천둥 치듯 곡하며 허둥지둥 고향으로 돌아간다.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13도 의병도 뿔뿔이 흩어진다. 개인윤리 효(孝)가 국가윤리 충(忠)보다 중요했던 것이다.

한중일(韓中日) 3국을 비교해 보면, 역사적 배경이 달라서 그리된 듯하다만, 한국은 개인윤리가, 중국은 사회윤리가, 일본은 국가윤리가 각각 윤리의 기본으로 자리 잡았다.

중국인이 해외로 이주하면 그들끼리 똘똘 뭉친다. 사회윤리 곧 신의(信義)가 그 밑바탕에 깔려 있다. 며칠 전에 마닐라 영사였던 친구를 만나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다. 중국인이 납치되면, 자기들끼리 십시일반 쌓아둔 기금으로 인질범이 요구하는 금액의 10배를 그 인질범 목에 건다고 한다. 그 결과 필리핀 사람들이 중국인은 함부로 건들지 못한다고 한다. 반면에 한국인들은 달랑 스마트폰 하나 값으로 동족을 청부살인하는 경우가 그렇게 많다고 한다.

한국인은 해외로 이주하면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고 등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만, 내 가족만, 한 줌밖에 안 되는 내 패거리만’ 잘되면 그만인 것이다. 이걸 정이 많게, 인정이 넘치게 잘도 포장하여 난생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간도 쓸개도 다 빼 줄 듯 살갑게 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뒤통수를 친다. 청부살인 안 하면 다행이다! 그러다가 다 같이 망하고!

일본인이 해외로 이주하면 그 나라에 충성을 다하여 그냥 녹아 버린다. 2차대전 당시 이런 문화를 모르고 미국이 일본계 미국인을 격리했는데, 그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옛 조국을 위해서 새 조국에서 내부의 적이 될 생각이 그들에겐 눈곱만큼도 없었는데!

반미 촛불(왼쪽)의 도화선이 된 미순이 효순이 사건과 참수리호(오른쪽)에 탄 국군 6명이 북한의 공격에 의해 무참히 수장되었음에도 촛불 민심은 북한을 꾸짖지 않았다.
반미 촛불(왼쪽)의 도화선이 된 미순이 효순이 사건과 참수리호(오른쪽)에 탄 국군 6명이 북한의 공격에 의해 무참히 수장되었음에도 촛불 민심은 북한을 꾸짖지 않았다.

2002년 훈련 중이던 장갑차에 두 여중생이 아까운 생명을 잃었다. 역시 2002년, 불과 2년 전의 6·15공동선언을 헌신짝같이 내던지고, 인민군이 북방한계선(NLL)을 유람하듯 넘어와서 구닥다리 군함의 구닥다리 대포로, 괴이한 교전수칙에 따라, 6·15공동선언의 취지에 따라, 제발 물러가 달라고 애원하던 한국의 최신식 참수리호를 일방적인 선제공격 더하기 정조준 발포로 벌집으로 만들어 가라앉혔다. 너무도 억울해서 두 눈을 부릅뜬 채 국군 6명이 산화했다.

결과는? 두 여중생의 영혼은 촛불로 위로되고 또 위로되고 또 위로되었다. 북한에서도 대대적으로 위로되었다. 그것은 당시 민심의 바다에 뒤집혀 침몰 직전이었던 새천년민주당호가 5년간 덤으로 노빠들이 폐족(廢族)이 될 때까지 민심의 바다를 유유히 항해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참수리호의 원혼을 위해 전국이 예전처럼 일제히 독재자 김정일을 규탄했으면, 반공 궐기대회를 대대적으로 벌였으면, 노무현 대신 이회창이 여반장으로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다.

이회창은, 그것이 무죄로 드러났지만, 민주당의 기획물이었음이 드러났지만, 김대업을 이용한 대국민 사기극이었음이 밝혀졌지만, 아들이 석연찮게 군대 안 간 것 때문에, 두 번이나 대문 바로 앞에서 두 눈에 애정을 가득 담아 푸른 집을 쳐다보고 또 쳐다보다가 비루먹은 상갓집 개처럼 쫓겨났다. 얼핏 보면, 촛불 행렬과 ‘특이 체질’ 특집방송은 대단한 애국심의 발로(發露) 같다. 아니다, 개인윤리에서 비롯되었다. 새파란 시기심의 오뉴월 발로였다.

“내 아들은 갔는데, 네 아들은 왜 빠졌느냐! 흙 수저는 개고생했는데, 금 수저는 왜 용호사(龍豪奢)했느냐?”

만약 그게 국가윤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면, 노무현은 대통령으로서 군복무 기간을 24개월에서 1개월이라도 연장했어야 했다. 최소한의 양심이라도 있었으면, 단 하루도 줄이면 안 되었다. 그러기는커녕 18개월로 줄이려다가 거센 반발에 부딪쳐 22개월로 줄였던 것이다. 노무현의 비서실장 출신 문재인은 다시 18개월로 줄이려고 한다. 도무지 국가윤리가 없는 것이다.

한두 명 군대 안 간 것이 군인 숫자로 따지면, 60만 곱하기 24분의 6은 15만(600,000×6/24=150,000), 무려 15만 명 감군(減軍)보다 중요한 나라! ‘대한민국 헌법을 수호하고 평화적 자유통일을 지향한다!’고 엄숙하게 선서한 대통령이 취임선서를 끝내자마자 말 한 마디로 15만 명에게 군 면제의 특별 선물(surprise)을 안겨주겠다는 나라! 2개월 단축만으로도 5만 명에게 군대를 면제해 준 거나 마찬가지다. 북한의 인민군은 120개월 복무하거나 말거나, 수령이 3백만의 피와 살로 핵폭탄과 미사일을 개발하거나 말거나!

또한 그것이 국가윤리라면, 연좌제가 인정되지 않는 민주 국가의 문제라면, 이회창의 아들이 아니라 이회창의 군 복무를 따져야 했다. 김대중이나 김영삼의 군 복무를 따져야 했다. 양김(兩金)은 둘 다 군대 안 가고 이회창은 장교로 군 복무했지만, 아무도 그건 안 따졌다. 각기 사실상 ‘아버지’로 모시고 있던 김영삼과 김대중에게는 개인적으로 불리했기 때문이다, 무척!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를 봉건적 가부장적 개인윤리로 사유화한 대표적 사례이다. 입으로만 민주주의를 울부짖은 것이다. 목적은 오로지, 가문의 영광인 권력을, 최고 권력을 잡기 위해서! 입신양명하기 위해서! 국가를 사유화해서 허벌난 갑질로 끼리끼리 잘 처먹고 잘살기 위해서!

세월호(왼쪽)는 현 정권을 유지시키는 영원한 키워드다. 문재인 대통령은 현충일에도 천안함(오른쪽) 희생자 유가족 보다 세월호 유가족을 찾아 식사를 했다.
세월호(왼쪽)는 현 정권을 유지시키는 영원한 키워드다. 전 정권에 대한 적개심을 유지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현충일에도 천안함(오른쪽) 희생자 유가족은 아예 잊은 듯, 세월호 유가족을 불러 오찬을 나눴다.

세월호와 천안함도 마찬가지다. 전자는 해상사고였고 후자는 인민군의 기습에 의한 전쟁이었다. 둘 다 안타까운 죽음임에는 틀림없지만, 일본이나 중국, 미국 같았으면, 어느 것을 중시했을까? 국민국가의 주권이 UN의 헌장이나 결의 또는 선언보다 우선하는 지구촌에서, 국가가 없으면, 있어도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지 못하면, 여권이 없으면, 탈북자나 시리아 난민처럼 인간의 생명이 일개 유기견의 그것보다 나을 것 없는 냉엄한 국제환경에서, 죽음도 사고사(事故死)와 전사(戰死)는 천양지차일 수밖에 없고 그렇게 대접할 수밖에 없다.

어느 나라나 공동묘지가 아니라 무명용사의 무덤 앞에서 엄숙히 고개를 숙이는 이유가 달리 있지 않다.

유독 우리나라만 정반대다. 군인과 경찰의 죽음과 부상은 개죽음이요 참새 부상이고, 정치 문제화할 만한 민간인의 죽음과 부상은 용의 죽음이요, 봉황의 부상이다.

왜 김대중이나 김영삼이나 노무현 집권 시의 하고많은 사건사고 중에서 오로지 두 여중생의 교통사고만 ‘피 철철 섬뜩’ 시청각 자료로 엄청나게 부각시켜 그렇게 분노의 촛불로 연결했을까. 총이나 대포를 쏘아서 그런 것도 아닌데, 미국을 향해서는, 1953년 이래 제2의 6·25를 족히 90% 막아 준 미국을 향해서는 그렇게 살을 부들부들 떨었지만, 민주화 세력을 자처하는 사람들일수록 핵개발이든 무력침략이든 필요하면 언제든지 6·15선언을 깡그리 무시하는 북한에 대해서는 어찌 그리도 너그러운가.

기본적으로 국가윤리와 사회윤리가 태부족하거나 아예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필요할 때면 아무리 사악한 자라도 민족이라는 애매모호 두루뭉술한 말로, 또는 화기애애한 평화라는 거대한 성스러운 우산으로, 인정이 찰랑찰랑 넘치는 초현대적 안드로메다 이지스(aegis) 방패로 가려 주면서 자기편으로 은근슬쩍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2300만 노예의 ‘최고존엄’은 절대로 당당한 말이 아니라 ‘눈 감고 아웅’ 행동으로 알게 모르게 ‘내 가족’으로, ‘내 편’으로 받아들여서 무조건 용서하는 알뜰살뜰 인정의 성벽을 높게 두텁게 튼실하게 쌓아 주기 때문이다.

정적에 대해서만은 기기묘묘한 이그노벨상(Ig Nobel Prize)급 음모설을 퍼뜨린다. 민주적 선거 절차에 따라 국민의 다수가 지지한 대통령에 대해서는 7시간이니, 밀회니, 미용이니, 성형이니, 비아그라니, 아니면 말고, 국정(國政)과는 전혀 관계없는 걸로, 무슨 슈퍼맨도 아니고, 사고 현장에 직접 아는 척 끼어들면 방해가 될 뿐인데,

누구는 전쟁이 났는데도 국군 총사령관이 국가의 운명일랑 ‘설마’에게 맡기고 지극히 개인적인 일을 보러 갔어도 검은 리본 대신 새빨간 넥타이 매고 이웃 나라에 축구 구경 갔어도 약속 잘 지킨다고, 참 신의가 있다고 은근히 칭찬하더니,

유독 정적에 대해서는 왜 온갖 악의적 개인적 창의적 의혹을 마구잡이로 지어내고 한껏 부풀려 기어코 임기를 못 채우게 했을까.

그건 그들이 한국인의 약점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국가윤리가 아니라 개인윤리로 문제 삼으면 한국인의 냄비는 1분도 안 되어 팔팔 끓는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개인윤리와 사회윤리가 부딪칠 때는 사회윤리, 개인윤리와 국가윤리가 부딪칠 때는 국가윤리의 편에 서지 않는 한, 이인영의 후손이 아니라 김유신의 후예로 거듭나지 않는 한, 5천만은 제2의 6·25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2018. 6. 11.)

csj@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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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루 2018-06-13 22:32:23
제2의 한국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불안한 현실이 점점 눈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돈을 갖다바치고 억지춘향식으로 만들어낸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의 피상적인 성과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며, 모두 거나하게 취해서 내일이라도 평화통일이 될 것처럼 떠들어대는 앵무새 언론들과 거기에 장단 맞추며 놀아나는 불쌍한 국민들은 제2의 625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