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정치학원, 괴멸된 빨치산 간부 긴급양성
금강정치학원, 괴멸된 빨치산 간부 긴급양성
  • 유진
  • 승인 2018.06.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포로가 된 남한 내 북한 유격대
포로가 된 남한 내 북한 유격대
<25> 해체된 빨치산 재건 위해 기구재건

노동당 정치위원회 결정서에는 미(未)해방 지구의 당 및 유격대 활동을 지도하기 위해 중앙당에 연락부를 설치하고 여기에서 인민군 최고사령부 유격지도처의 업무를 관할하도록 하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김일성은 전쟁이 터진 뒤 '노동당 서울현지지도부'로 개편함으로써 거의 해체상태나 다름없었던 노동당 중앙위원회 대남공작기구인 연락부를 재건하고 확대했다.

김일성은 노동당 서울현지지도부 책임자에 임명했던 이승엽을 평양으로 불러들여 노동당 대남담당비서에 임명하고 배철을 연락부장에 임명했다. 그리고 윤순달ㆍ박승원ㆍ이송분 등을 부부장에 임명하였다.

아울러 연락부 안에 조직공작과, 조사정보공작과, 선전교양과, 작전지도과, 유격지도과, 후방공급과, 재정과, 통신연락과, 초대소 관리과, 간부과, 종합과, 의무과 등의 부서를 두고 남한 내 지하당조직과 유격대를 전체적으로 지도했다.

이와 함께 남한 내 유격대활동을 지휘하고 있던 인민군 최고사령부 직속 유격지도처(일명 526군부대)를 노동당 연락부 산하에 배속시키고 연락부장 배철이 유격지도처장을 겸임하도록 하였다.

유격지도처 부처장은 김영식이었는데, 여기에는 작전지도과, 연락소지도과, 연락통신대지도과, 간부대열과, 정찰조사과 등이 있었다. 그리고 전쟁발발 후 해체되었던 대남공작전담 연락소와 사업소들을 1951년 7월을 기점으로 재건했다.

이때 재건된 연락소가 동부연락소(강원도 회양군 내금강면), 중부연락소(강원도 회양군 난곡면), 서부연락소(황해도 금천군 구어면), 개성연락소(개성시 자남동) 등이며 서해를 통한 해상침투와 대남 물자교역을 담당하는 연백사업소와 옹진사업소도 설치되었다. 노동당 정치위원회 결정서에는 또한 지하당 간부 및 유격대 지도자들을 키우려고 1천여 명의 인원을 훈련시킬 능력을 가진 간부훈련소를 설치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황해도 서흥군 율리면 오동리 산속서 1천여명 공작원 육성

빨지산의 전설이라 불리던 이현상
빨지산의 전설이라 불리던 이현상

이 같은 결정에 따라 1951년 10월 황해도 서흥군 율리면 오동리 산속에 1천여 명의 지하당 간부들과 유격대 지휘성원들을 수용하고 그들에게 교육과 훈련을 시킬 수 있는 금강정치학원을 조직하고 중앙당 연락부가 직접 운영했다.

당시 금강정치학원 원장은 서울시당위원장이었던 김응빈(인민유격대 제1지대장)이었고, 정치부원장에는 송을수(전 강동학원 부원장, 전 서울학원 원장), 후방부원장에 이인동(전 전평부의장, 중앙당 재정경리부 부부장), 군사부원장에 임호(전 인민유격대 제6지대 참모)가 기용되었다. 그리고 초급당위원회와 간부부, 기술부, 병원 등도 꾸려졌다.

초기에 금강정치학원 학제는 1개월 단기반과 3개월반, 6개월반 등으로 편성했다가 1952년 초에 들어서면서 중대 및 소대 단위로 개편했다. 1개 중대는 60~70명이었고 4~5개 소대로 편성하였다. 1~18중대는 당 간부 출신으로서 수준이 높은 자들을 공작원 후보자로 양성하는 과정이었다. 21~24중대는 중간수준급의 간부를, 31~33중대는 평당원과 문맹에 가까운 수준 낮은 자들을, 51~52중대는 고령자들을 편입시켰다. 71~72중대는 과오를 범한 낙오자들을 편입시켰다.

금강정치학원은 지하당공작에 필요한 정치이론교육, 군사훈련과 함께 자동차운전, 이발, 목공, 토공, 시계수리 등 신분위장에 필요한 기술교육도 실시하였다. 이와 같은 내용으로 약 6개월간의 교육을 실시한 다음 1952년 3월 금강학원 학생들의 1단계 교육훈련을 종결짓고 지하공작원 및 유격대원으로 부적합한 300명 정도의 인원으로 유격대 제10지대를 편성해 황해도 연백지구에서 농사짓도록 하였다.

한편, 당시 북한노동당 연락부와 유격지도처는 전멸상태에 빠진 남한 내 유격대를 되살리기 위해 금강정치학원에서 훈련시킨 유격대 지휘성원들을 남한 각 지역 유격대에 침투시켜 역량을 보강했다.

◇전멸상태 빨치산 유격대를 20-50명 소부대로 지원

유격대 지휘성원으로 파견되는 자들은 인민군 지휘관 또는 유격대 지휘관 경험을 가진 자로서 금강정치학원에서 유격대 교육 훈련을 받은 후 추가적인 교육과 훈련을 실시한 다음 1952년 8월부터 5회에 걸쳐 각각 20~50여명 단위로 소부대로 편성해 남쪽으로 침투했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많은 인원이 침투 도중 군경 토벌대와 조우하여 사살되었으며 살아남은 자들은 정전을 전후한 시점에 남한 내 잔존 유격대 소멸과 함께 사살 또는 체포 처형되었다.1952년 하반기에 이르러서는 지리산의 이현상, 박영발, 방순표 중심의 제5지구당 지도부와 그 산하 유격대인 김지희 부대와 이영희 부대를 제외한 다른 지구당 지도부와 유격대들이 거의 전멸되다시피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52년 10월 초에 "미(未)해방 지역에서의 지하당 조직들과 인민유격대들의 활동정형과 나타나고 있는 편향에 대하여"를 토의하고 지하당 조직들과 유격대들의 활동에서 나타나고 있는 편향과 결함을 시정할 것을 지시하였으나, 이 역시 현실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기에 제대로 실행될 수 없었다.〈계속〉

yj@jayoo.co.kr

더 자유일보 일시 후원

“이 기사가 마음에 들면 후원해주세요”

  • ※ 자유결제는 최대 49만원까지 가능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