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량학살 일어난 부차에서 세 자녀와 함께 탈출한 어머니의 증언

“러 군들이 데려간 사람들에게 총을 쏴 죽이는 것을 봤다고 한다”
“매일 밤 전투기·포격소리들이 계속 들려서 잠을 잘 수도 없었다”
“도로에는 시신들도 있었는데, 자전거 옆의 민간인 시신도 보았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키예프) 외곽의 한 공동묘지에서 지난달 16일(현지시간) 한 노인이 지난달 말 인근 부차 마을에서 러시아군에 살해된 아들의 관을 앞에 둔 채 오열하고 있다. /연합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키예프) 외곽의 한 공동묘지에서 지난달 16일(현지시간) 한 노인이 지난달 말 인근 부차 마을에서 러시아군에 살해된 아들의 관을 앞에 둔 채 오열하고 있다. /연합

“나는 부차(Bucha)에 살았다. 자녀 셋과 함께 살고 있었고, 남편은 멕시코에서 음악가로 활동하는 중이다. 어느 날 갑자기 포격 소리들과 폭탄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너무 놀라 멍하니 앉아 있다가, 얼른 정신을 차리고 식료품들과 생존에 필요한 물품들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 정도 구해야 할지도 몰랐다.”

3일 국내 한 선교사 부부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부차(Bucha) 출신의 비올라 연주자 올레시아씨는 이같은 ‘부차 학살’ 당시 소식을 이들에게 전했다. 부차 학살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후 부차 지역에서 민간인을 대량학살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건이다.

올레시아는 선교사 부부에게 “일단 현금 인출기에 가서 현금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급히 밖으로 차를 몰고 나갔지만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이 상점 앞에 줄을 서 있었고, 차들도 주유소에 길게 줄을 서 있어 아무것도 구입할 수 없었다”며 “심지어 차에 기름도 넣을 수 없어,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올레시아는 “다음 날 마을 주변에서 많은 연기들이 보였다. 포격이 계속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왜 이런 상황이 됐는지, 잘 몰랐지만 마을에 러시아 군인들이 들어온 걸 보고서야 알게 됐다”며 “러시아 군인들이 집집마다 들어가기 시작하는 것을 보면서 몰래 창문으로 영상을 촬영했고, 러시아 군인들이 보이지 않을 때 테이프로 유리창에 붙이기 시작했다. 만일을 대비해, 여권을 비롯한 필수 문서들을 챙겼다”고 했다.

이어 “갑자기 주변에 있는 집 세 곳에 폭탄이 떨어졌다. 폭탄 떨어지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며 “1층 복도에 세 자녀와 함께 있다가, 폭격 소리가 들리면 화장실로 숨었다. 화장실에는 창문이 없기 때문이었다. 밤에도 포격이 계속됐고, 전투기들이 마을 위로 날아다녀 두려움에 잠을 청할 수 없었다. 너무 두려워 위경련이 일어날 정도였다”고 했다.

◇“러시아 군인들이 데려간 사람들에게 총을 쏘아 죽이는 것을 봤다고 한다”

그녀는 “멕시코에 있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고, 남편은 일단 집에 머무는 게 안전할 것 같다고 했다. 3월 4일, 부차는 러시아 군들에 의해 완전히 점령당했다”며 “다시 마을에 온 러시아군들은 차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만일 러시아 군인들이 우리 집에 온다면,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 일어날 것 같아 두려웠다”고 했다.

올레시아는 “러시아 군인들이 이웃집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차 안을 살펴보았고 사람들을 거리로 데리고 가기 시작했다”며 “그들이 어디로 끌려갔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탈출하기 전 이웃 사람들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러시아 군인들이 데려간 사람들에게 총을 쏘아 죽이는 것을 봤다고 한다. 우리는 계속 기도했다. 세 자녀와 함께 화장실에 숨어 성경을 읽으면서 기도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상황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다. 러시아군이 마을을 언제까지 점령하고 있을지, 언제 우크라이나 군이 러시아 군에게 반격을 가해 부차를 다시 되찾을지, 식품과 물, 전기와 인터넷이 끊어졌는데 언제까지 상황이 계속될지 알 수 없었다”며 “일단 집에 남아 있는 음식들을 요리해서 아이들과 함께 먹었다”고 했다.

이어 “3월 4일, 집 2층에서 창문으로 탱크들이 집 앞에 서 있는 것과, 러시아 군인들이 우리 이웃집 사람들을 데려가는 것을 스마트폰으로 촬영했다”며 “곧 러시아 군인들이 집으로 왔고, 그 중 한 명이 나무로 된 창문을 열고자 시도했다. 그들은 집 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러시아 군인들이 문을 두드렸고, 문을 열었더니 집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어린 세 자녀와 함께 있는 우리를 거실에 세웠다. 다행히 러시아 군인들은 가만히 보더니, 절대 집 밖으로 나오지 말고 집에만 있으라고 하더니 밖으로 나갔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에 응답하신 것을 느낄 수 있었다”며 “우리는 남편 친구들과 연락하려고 애를 썼지만, 스마트폰을 사용할 수 없었다. 집 가까운 곳에 우리 차가 있었고, 우리는 그곳으로 가려고 애를 썼지만 그럴 수 없었다. 창문으로 보니, 매일같이 러시아 탱크들이 계속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고 했다.

◇“매일 밤마다 전투기 소리와 포격소리들이 계속 들려서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올레시아는 “우리 이웃들은 우리를 도와주려 애를 썼고, 아이들을 위한 우유와 식품들을 주어 그 시간들을 버틸 수 있었다”며 “나는 가스가 조금 남은 버너를 이용해 음식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주었다. 우리는 집 밖의 눈으로 물을 만들어 세수를 하고 손을 씻었다. 날씨는 매일 추웠다. 전기도 나갔고 가스도 떨어져, 음식을 만들 수도 손을 씻을 수도 없었다. 매일 밤마다 전투기 소리와 포격소리들이 계속 들려서 잠을 잘 수도 없었다. 매 순간 공포와 두려움이 몰려왔다”고 했다.

그녀는 “3월 8일 아침 7시에 일어났을 때, 이웃집 사람들이 와서 혹시 탈출을 위한 ‘인도주의적 대피통로(Green Corridor)’에 대해 들어봤는지 물었다”며 “우리는 워낙 가짜 뉴스들이 난무했기 때문에 스마트폰을 이용해 여러 곳에 전화해서 확인했고, 그 정보가 사실임을 확인했다. 3월 9일 아침, 이웃 사람들과 함께 승합차에 탑승했고, 피난민을 의미하는 흰색 깃발을 차에 달았다”고 했다.

이어 “출발해서 이동하는 동안에도 대피 통로 주변 마을에 계속 포탄이 떨어졌다. 가는 길에 러시아 군인들이 이르핀을 포격하는 소리와 총소리도 들었다. 탈출하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두려웠다”며 “탈출 과정에서 우리는 러시아 군 검문소 네 곳을 지났다. 그들은 차 안을 수색했고, 그럴 때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 두려움에 사로잡혔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우리의 스마트폰을 조사했다. 그들이 원하지 않는 사진들과 동영상들이 저장돼 있는지 찾는 것 같았다. 나는 스마트폰을 숨겼다. 그 안에 몰래 촬영한 러시아 군인들의 영상이 있었기 때문이다”며 “그들은 내가 가진 비올라를 검사했다. 그 군인은 비올라가 무엇인지 몰랐고, 악기 내부와 케이스에 혹시 무기를 감추고 있지 않은지를 살폈다. 나는 ‘그냥 악기일 뿐’이라고 설명했다”고 했다.

◇“도로에는 시신들도 있었는데, 자전거 옆에 있는 민간인 시신도 보았다”

올레시아는 “도로에는 시신들도 있었는데, 자전거 옆에 있는 민간인 시신도 보았다. 총격을 받고 총알 자국으로 뒤덮인 채 불에 탄 차량들, 포격으로 깊게 파인 도로들, 파괴된 집들로 인해 도로는 매우 복잡했다”며 “우리는 우크라이나와 폴란드 국경 근처에 있는 기차역에 도착했다. 그곳에서는 난민들을 폴란드까지 보내는 기차가 있었다. 그 기차를 타고 폴란드에 갈 수 있었고, 친절한 사람들의 도움으로 프라하까지 올 수 있었다”고 했다.

끝으로 “내 남동생은 지금 우크라이나 군인으로 러시아군과의 전쟁에 참여하고 있다. 다행히 아직까지 안전하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나는 전쟁이 끝나면 다시 우리 마을로 돌아가고 싶다. 어린 시절부터의 나의 모든 삶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전쟁 전 내가 연주하던 카페, 아이들이 놀던 놀이터, 다니던 학교, 그리고 이웃들이 함께 행복했던 기억들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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