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박헌영 숙청...대남공작 70년사
[연재]박헌영 숙청...대남공작 70년사
  • 유진
  • 승인 2018.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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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과 박헌영(왼쪽부터)
김일성과 박헌영(왼쪽부터)
<26>박헌영 숙청과 이현상 사살

김일성은 1952년 12월 15일 열린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5차 전원회의 이후 전원회의 문헌 토의를 명분으로 박헌영ㆍ이승엽을 비롯한 구 남로당 지도부를 숙청했다. 이에 따라 그들이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대남공작 부문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김일성과 북한지도부는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5차 전원회의 결정을 채택하고 노동당 중앙위원회 명의로 전체 당원들에게 '붉은 편지'를 보내 전원회의 결정 토의 사업과 반(反)종파 투쟁을 동시에 벌였다. 이러한 조치는 북한내부 뿐만 아니라 대남공작조직과 남한의 각 지하당 조직, 유격대 조직들에도 각각 내려졌다.

이에 따라 대남공작 부문에서는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5차 전원회의 결정 토의와 박헌영ㆍ이승엽 등 구 남로당 지도부의 반종파 투쟁을 동시에 진행했다. 이 과정에 박헌영과 이승엽은 물론 연락부장 배철과 부부장 윤순달ㆍ박승원 등 중앙당 연락부 주요 간부들이 ‘미국의 간첩’으로 몰려 체포 구금 제거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일성과 북한지도부는 1953년 3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를 열고 종전의 노동당 연락부와 그 산하기구들을 전면 해체하고 새로운 기구로 조직을 개편했다. 정치위원회 결정에 따른 연락부 조직기구 개편은 1953년 3월 중순~9월 말까지 6개월 남짓한 기간 동안 진행되었다.

◇남로당 지도부가 대남공작 조직 남한에 노출했다고 누명 씌워

북한지도부가 중앙당 연락부를 비롯한 대남공작 기구를 전면 해체하고 새롭게 편성한 것은 박헌영ㆍ이승엽 등 남로당 지도부 때문에 기존 연락부 조직과 공작전술 등이 전부 남한 정보기관에 노출되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말하자면 구 남로당 지도부가 대남공작과 관련된 비밀을 모두 남쪽에 넘겼기 때문에, 대남공작에서는 보안이 생명인데 이것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우선 기존의 노동당 연락부 조직 기구를 모두 폐지하고 전혀 새로운 조직기구로 개편했다. 새로 구성된 연락부 부장에는 갑산파 두목으로 8.15광복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하여 6.25전쟁 시기 인민군 총정치국 부국장을 역임했던 박금철이 임명되었다. 부부장에는 어윤갑과 김창수, 최달현과 장지민, 전인선과 이수영, 박영순과 장원철, 이상규 등 9명이 기용되었다.

이 가운데 인민군 3군단 정치부군단장 출신의 어윤갑은 기존 당 조직들을 수습 및 재건하는 조직공작 제1부문을 담당했다. 전쟁발발 전 연락부장을 하다가 전쟁 시기에 내무성 정보국 부국장에 임명되었던 김창수는 새로운 조직을 구축하는 조직공작 제2부문을 맡았다.

전 인민군 총정치국 부국장 겸 적공부장이었던 최달현은 특수기관 및 국군을 상대로 하는 공작을 담당하는 조직공작 제3부문을 담당했다. 연안파 출신으로 중앙당 조직지도부 부부장을 역임했던 장지민은 해외우회침투 공작을 담당하는 조직공작 제4부문을 맡았다.

전 중공군 사령부 문화연락부장이었던 전인선은 공작원의 침투 및 복귀 시 안내를 하는 제5부문에 임명되었다. 경성제국대학 출신으로 학병동맹 책임자로 활동하다 평양시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던 이수영은 남한의 각 분야 정보를 조사, 연구, 분석하는 제6부문을 담당했다.

김일성 빨치산 출신으로 인민군 최고사령부 통신부장이었던 박영순은 중앙당의 모든 통신연락을 담당하는 제7부문을, 인민군 군단정치부장을 역임했던 장원철은 공작원 침투에 필요한 일체 장비와 물자 등을 보급하는 제8부문을 맡았다. 전 중앙당 재정경리부 부부장이었던 이상규는 연락부와 산하 조직에 필요한 주부식물 등 생필품을 보급하는 제9부문에 기용되었다.

다음으로 북한 지도부는 기존에 있었던 연락부 산하 동부와 중부, 서부 등 각 지역연락소 및 방향들을 전면 폐지하고 위치와 조직을 전부 바꾸었다. 해상의 경우 동ㆍ서 연락소를 강원도 고성과 황해도 연안에, 육상연락소를 평강에, 한강과 임진강을 통한 침투를 전담하는 개성연락소를 두었다. 한편, 각 연락소 산하에는 2~3개의 전투방향을 두었고 1개 방향에는 3개의 전투 안내조를 두었다.

또한 기존의 유격지도처는 물론 공작원 교육훈련 기지였던 금강정치학원과 통신연락훈련소, 평북도 의주에 있던 공작원 특수기술훈련소(낙하산), 개성과 황해도 연안의 포구에 있던 대남교역연락소들도 전면 폐지했다.

◇유격대, 지리산에 집결했으나 괴멸

이러한 가운데 남한지역에서 활동하는 유격대에 대한 한국군경의 토벌작전이 본격화되자 여러 지역에서 활동하던 유격대들이 지리산으로 집결해 참호를 파고 대부대 진지전과 자체 방어전을 벌이는 동시에 역량보존을 위한 식량약탈 등에 급급했다.

이현상의 총지휘하에 지리산으로 집결한 유격부대들은 1951년 12월 초~1952년 3월 중순에 걸치는 공비토벌전투사령부 예하 부대들의 대토벌 작전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들은 여기저기로 뿔뿔이 흩어져 도망 다니면서 생명유지를 위한 보급투쟁마저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처지에 빠져들었다.

여기에다 1952년 말부터 시작된 박헌영ㆍ이승엽 등 남로당 수뇌부에 대한 숙청은 남한 내 유격대원들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렸다. 또 1953년 7월 27일에 체결된 6.25 정전협정은 이들에게는 사형선고를 내린 것과 같았다.

결국 남한 내 노동당 지구당과 빨치산 활동은 1953년 8월 군경 토벌부대의 본격적인 대토벌 작전으로 지리산유격대 총사령관 이현상이 지리산 빚장골에서 사살되고 1954년 초에 제5지구당 지도부 성원들인 박영발과 방순표, 조병하와 김신우 등이 사살되었다. 이후 마지막까지 지탱하고 있던 김지회 부대와 이영희 부대의 전멸, 남도부 부대의 소멸과 함께 남도부가 생포되면서 빨치산 부대는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yj@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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