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4대 의혹’ III... 北 ‘서울 3일 지체’ 내막은
‘6·25전쟁 4대 의혹’ III... 北 ‘서울 3일 지체’ 내막은
  • 최성재 평론가
  • 승인 2018.06.2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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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세번째 이야기다.

6.25전쟁 68주년이 자났다. 6.25전쟁에서는 남북한 군보다 미국과 중공과 소련이 거의 전적으로 전쟁을 주도했다. 그 중에서도 모택동의 역할이 알려진 것보다 훨씬 컸다. 그것은 지금의 북핵 정국에서 시진핑의 중국이 막대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때문에 6.25전쟁의 실체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전쟁의 당사자였던 중국측이 작성한 자료를 바탕으로 해서 6.25전쟁을 분석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The 자유일보는 그런 측면에서 중국측 자료를 통해 △김일성이 서울에서 3일간 머뭇거린 이유 △김일성이 모택동의 인천항과 군산항 요새화 제안을 거부한 이유 △스탈린이 휴전을 계속 미룬 이유 △미국이 당시 스탈린 점령지 만주를 모택동에게 선물한 이유 등 6.25전쟁 4대 의혹을 전격 연재공개한다.

【전격공개】 중국 자료를 통해 본 ‘6·25전쟁 4대 의혹’ III

『‘서울 3일 지체’는 소련 군사고문이 없어서』

【최성재 평론가】

1954년 10월 1일 열병식을 함께 지켜보는 김일성과 모택동

◇ 모택동, 6.25전 한국 항구 철옹성화 제안했으나 김일성이 거부

모택동은 전쟁을 아는 자로서 전쟁을 모르는 김일성에게 남침 전에 또 한 번 엄청난 제의를 건넸다. 한국과 미국으로선 천행으로(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김일성이 이를 거부했다. 심지화의 대담에 나오는 내용이다.

모택동은 일찍이 스탈린과 김일성에게 중국이 한반도의 연해지구와 주요 항구를 방어하는 걸 도울 수 있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처음에 김일성은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중국의 제의를 접수하지 않았다. 후에 전황이 악화되자 김일성은 중국의 원조를 희망했지만, 스탈린의 동의가 없는 상황에서는 감히 중국에게 직접 군사 파병을 요구하지 못했다.

(毛泽东曾经向斯大林和金日成表示,中国可以帮助防守朝鲜半岛沿海地区和重要港口。但是起初,金日成认为美国不会干涉,因此没有接受中国的提议。随着战况的恶化,金日成希望得到中国的帮助,但是没有斯大林的同意,他不敢要求中国出兵。)

아찔한 순간이었다. 소규모 전투 외에는 실전 경험이 없던 김일성은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기보다 중국의 입김이 커지는 것만 걱정했던 것 같다. 이것이 한미 양국에게는 천행 또 천행이었다. 해군은 별것 없었지만, 중국은 능히 한국의 주요 항구와 해안 지역을 철옹성으로 만들 힘이 있었다. 김일성이 굴러 온 복을 차 버림으로써 인류 역사상 길이 빛날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가능했던 것이다.

미국은 어리석은 김일성 덕분에 덩케르크(Dunkerque)의 악몽을 피하고 한반도판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성공했던 것이다. 후에(1950-07-02) 주은래도 주중 소련대사 로시친(Roshchin)에게 해안 봉쇄를 다시 제안했지만, 이번에는 스탈린이 우물쭈물했던 것 같다. 중국의 영향력을 염려하던 김일성은 백전노장 팽덕회가 중공군을 몰고 오면서부터는 철저히 소외되었다. 사실상 소대장급으로 격하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을 점령하고 소련의 환심을 사기 위한 거리행진

◇ ‘서울 3일’은 소련군 작전 담당 고문이 없어서

탈북 시인 장진성이 6ㆍ25 수수께끼의 단초를 하나 제공했다. 인민군이 서울 점령 후 사흘간 머문 이유에 대해 김일성이 내뱉었다는 말을 소개한 것이다. 그는 북한에서 극비로 이조실록을 본뜬 ‘김조실록’을 편찬하는 일에 참여했다고 한다. 거기서 그는 많은 1차 사료(史料)를 접한 모양이다.

“소련 놈들이 무기를 제공하지 않았다!”

이것이 김일성의 말이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 심지화가 보다 신빙성 있는 말을 전한다.

사실상 작전계획은 전부 소련의 참모가 세웠다. 북한의 인민군은 크든 작든 작전경험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소련의 병사가 절대 38선을 넘어 전투에 참여하지 못하게 했다.

“혹시 체포되어 우리가 참전했다는 증거를 남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38선을 넘은 후에는 소련 군사고문의 지도가 없었기 때문에 계속 남진하던 북한 군대는 완전히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事实上,作战计划全部是由苏联参谋制定的,因为朝鲜人民军并没有多少作战经验。斯大林坚决不允许苏联士兵越过38线或是直接参加战争,因为“我们不想留下证据被人家指控我们参与了这件事”。而越过38线后,由于缺乏苏联顾问的指导,继续南进的朝鲜军队完全处于混乱之中。)

애초에 스탈린은 서울 점령까지만 작전을 세워 주었던 모양이다. 작전을 세울 소련 참모가 38선을 넘지 않았고 그 후의 작전에 대해 알려 주지 않았기 때문에, 김일성은 넘치는 기쁨 속에서 술에 취한 듯 갈피를 잡지 못했던 것 같다. 무기는 이미 스탈린이 원래 북한군만이 아니라 조선족 3개 사단까지 한국 지형에 맞는 무기로 중무장시켜 두었기 때문에, 스탈린이 무기를 안 주어 진격할 수 없었다는 김일성의 말은 믿을 수 없다.

자존심 문제로 김일성은 작전계획에 대한 무능을 차마 말할 수 없어서 이를 에둘러 소련의 무기 지원 부족으로 돌렸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넓은 의미에서 김일성의 서울 점령 후 소련의 지원이 부족했던 것은 틀림없었던 모양이다.

심지화에 따르면, 스탈린은 미국의 개입을 극도로 경계하여 심지어 미군이 1950년 10월 8일 연해주의 소련 공군 기지 7개를 아작 낸 것에 대해서도 찍 소리 않았다고 한다. 미국은 그렇게 손쉽게 제공권을 장악했다.  

csj@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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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루 2018-07-01 22:13:58
정말 천만다행으로 중국의 한반도 주요 항구 접수 계획이 무산됐었네요. 선생님 말씀처럼 하늘의 도움이 없었다면 625 전쟁 중 적화통일로 대한민국은 아예 존재할 수도 없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