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4대 의혹’ IV... 당황한 中蘇
‘6·25전쟁 4대 의혹’ IV... 당황한 中蘇
  • 최성재 평론가
  • 승인 2018.06.2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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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네번째 이야기다.

6.25전쟁 68주년이 자났다. 6.25전쟁에서는 남북한 군보다 미국과 중공과 소련이 거의 전적으로 전쟁을 주도했다. 그 중에서도 모택동의 역할이 알려진 것보다 훨씬 컸다. 그것은 지금의 북핵 정국에서 시진핑의 중국이 막대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때문에 6.25전쟁의 실체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전쟁의 당사자였던 중국측이 작성한 자료를 바탕으로 해서 6.25전쟁을 분석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The 자유일보는 그런 측면에서 중국측 자료를 통해 △김일성이 서울에서 3일간 머뭇거린 이유 △김일성이 모택동의 인천항과 군산항 요새화 제안을 거부한 이유 △스탈린이 휴전을 계속 미룬 이유 △미국이 당시 스탈린 점령지 만주를 모택동에게 선물한 이유 등 6.25전쟁 4대 의혹을 전격 연재공개한다.

『‘6·25전쟁 4대 의혹’ IV... 당황한 中蘇』

 【최성재 평론가】

스탈린의 흑해별장
스탈린의 흑해별장

스탈린과 주은래의 흑해 비밀회담... "북한을 포기하는 게 좋겠다고"

인천 상륙 작전 후에도 아슬아슬한 장면이 벌어졌다. 결정적으로 이때도 모택동이 다시 한 번 한민족의 운명을 망쳤다. 인천 등 한국의 항구를 요새화하라고 권유하던 주은래는 맥아더가 바다에서 육지로 걸어 나오자 즉각 모스크바로 날아간다. 스탈린은 흑해의 다차(별장)에 있었다. 한국에는 알려지지 않은 흑해회담이 열리는 순간이다.

1950년 10월 11일, 주은래 등은 모스크바를 거쳐 코카사스의 흑해 해변에 위치한 스탈린의 별장에 날아가서 그날 오후에 소련 국가 원수와 회담을 거행했다. 주은래는 중공중앙정치국 회의 내용을 소개하고 북한의 전황과 북한에 대한 원조 문제를 토론했다. 중국이 출병하는 문제는 실제로 아주 곤란하다고 설명했다. 소련이 무기와 장비 및 공군을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탈린은 지적했다.

“중국이 필요로 하는 비행기와 탱크와 대포 등 군사장비를 완전히 충족시킬 수도 있소. 그러나 소련의 공군은 준비가 미흡하오. 2개월 내지 1개월 반 안에는 출동할 수 없소.”

거듭 토론한 후에 쌍방은 합의를 보았다. 두 대국이 모두 준비가 미흡하여 북한을 포기하는 게 좋겠다고. 김일성에게 조속히 안전하게 후퇴할 것을 알려 주자고. 스탈린은 최후 결정은 모택동이 내리라고 요구했다. 그러면서 만약 북한이 미군과 한국군에게 점령되면, 그것은 중국 책임이라고 윽박질렀다.

영문판을 보면 김일성에게 중소가 지원하려면 6개월이 걸린다고 핑계를 대기로 합의를 봤다는 말도 나온다(영문 번역 생략).

(10月11日,周恩来等人经莫斯科飞抵高加索黑海边斯大林的休养地,并于当天下午与苏联领导人举行了会谈。周恩来介绍了中共中央政治局会议讨论朝鲜局势和出兵援朝问题的情况,说明中国出兵将面临巨大的实际困难,强调需要苏联提供武器装备和空军支援。斯大林指出:可以完全满足中国所需要的飞机、坦克、大炮等军事装备,但是,苏联空军尚未准备好,须在两个月或两个半月内才能出动。反复讨论以后,双方认为,既然大家都未做好准备,只好放弃朝鲜,及早通知金日成安排撤退。斯大林要求毛泽东作出最后的决定,这样如果北朝鲜最终被美军和南方占领,责任就是中国的。)

(After extended discussions, both sides agreed that since both could only be ready after six months when North Korea would have been occupied by South Korea and the US, they had to give up the country and inform Kim to arrange a retreat as soon as possible.)

마지막에 모택동이 단독으로 흑해회담을 거부하고 1950년 10월 15일 북한으로 중공군을 보내기로 최종결정한다. 스탈린의 노회한 외교와 모택동의 아시아 패권에 대한 야망이 잘 드러난다.

맥아더와는 다른 스타일의 유연한 리지웨이 장군
맥아더와는 다른 스타일의 유연한 리지웨이 장군

인천상륙 작전 직후 남북 총선을 제의한 스탈린

그 이전 10월 4일에 스탈린은 UN을 통해 미군이 38선을 넘지 않으면, 북한으로 하여금 무기를 버리게 하고, 아울러 국제연합위원회가 북한으로 들어가 총선을 실시하는 것을 주재할 수 있게 하겠다는 제의도 했다.

(10月4日,联合国秘书处的一位苏联工作人员邀请挪威驻联合国代表共进午餐,希望他作为中间人向美国政府传话:如果麦克阿瑟同意在三八线止步,苏联将劝说北朝鲜人放下武器,并允许联合国委员会进入北朝鲜主持大选。)

미국은 이를 거부했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모택동도 미군이 38선을 넘으면 좌시하지 않겠다고 여러 번 경고했지만, 미국은 이것도 무시했다. 인천상륙작전이 너무 빛났기 때문에 UN군에 의한 남북통일은 1950년 크리스마스 이전에 달성할 수 있다고 오판했던 것이다.

맥아더처럼 모택동도 처음의 성공에 도취되어 후에 영국이 중심이 되어 발의한 1ㆍ4후퇴 상황에서 휴전선을 긋자는 제안을 거부했다. 서울이 적에게 넘어갈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모택동으로서는 그걸로 만족하지 못하고 조만간에 얼마든지 적화통일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장점은 유연한 민주적인 정책결정이다. 실수를 빨리 깨닫고 실수를 만회하는 의사소통이다. 트루먼은 맥아더를 더 이상 신으로 여기지 않고 쫓아낸 다음, 단호하고 영리한 리지웨이를 보내 중공군에게 본때를 보여 주었다. 

csj@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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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루 2018-07-01 22:24:36
625전쟁의 진행과정(중공이나 미국 모두 625 전쟁 중 통일을 자신했음...)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한반도의 남북통일은 지금의 북핵정국 타개 양상과 같은 양보, 협상, 대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전쟁이라는 커다란 희생과 댓가를 통해서만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