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진설비 돈 갖다주기


막힌 하수도 뚫은 노임 4만원을 들고
영진설비 다녀오라는 아내의 심부름으로
두 번이나 길을 나섰다
자전거를 타고 삼거리를 지나는데 굵은 비가 내려
럭키슈퍼 앞에 섰다가 후두둑 비를 피하다가
그대로 앉아 병맥주를 마셨다
멀리 쑥꾹 쑥꾹 쑥국새처럼 비는 그치지 않고
나는 벌컥벌컥 술을 마셨다
다시 한번 자전거를 타고 영진설비에 가다가
화원 앞을 지나다가 문 밖 동그마니 홀로 섰는
자스민 한 그루를 샀다
내 마음에 심은 향기 나는 나무 한 그루
마침내 영진설비 아저씨가 찾아오고
거친 몇 마디가 아내 앞에 쏟아지고
아내는 돌아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냥 나는 웃었고 아내의 손을 잡고 섰는
아이의 고운 눈썹을 보았다
어느 한쪽,
아직 뚫지 못한 그 무엇이 있기에
오늘도 숲속 깊은 곳에서 쑥국새는 울고 비는 내리고
홀로 향기 잃은 나무 한 그루 문 밖에 섰나
아내는 설거지를 하고 아이는 숙제를 하고
내겐 아직 멀고 먼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

박철(1960~ )

 

/게티이미지
/게티이미지

☞먼 과거에 시인들은 마을을 옮겨 다니며 창작시를 음유(吟遊)하고 합당한 대가를 받았다. 그들을 일컬어 프랑스에서는 트루바루르(troubadour), 독일에서는 민네징어(minnesinger)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런 음유시의 전통은 오래 전에 끊겼다. 오늘날 전업시인은 멸종위기종이다. 현재의 위협 요인이 제거, 완화되지 아니할 경우 가까운 장래에 전업시인은 사라질 것이다. 대중은 시 창작을 높이 평가하되 거기에 합당한 대가를 치를 마음이 없다.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는 ‘배달사고’를 낸 시인의 이야기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한 번은 굵은 비가 내려 피하다가 병맥주를 벌컥벌컥 마셔버렸고, 또 한 번은 화원에서 ‘동그마니 홀로 섰는 자스민 한 그루’를 샀다. 혹자는 대책 없는 시인이라고 비판할 법도 하다. 가난한 시인에게 ‘아직 뚫지 못한 그 무엇’은 가장의 책무이고 그 길은 아직 멀기만 하다. 어쩌면 죽어야 끝나는 길일 테지만 ‘아이의 고운 눈썹’과 가난을 묵묵히 견디는 착한 아내가 있는 한 시인은 시 쓰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저작권자 © 자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