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동식
주동식

40대 이하인 분들에게는 실감이 나지 않겠지만, 과거 어느 시점의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는 파출소나 동사무소 등 일선 행정기관에 가는 일이 상당한 공포와 부담이었다. 이른바 ‘와이로’ 등으로 불리던 급행료 관행에 더해 심지어 구타나 폭행의 위험성조차 없지 않았다. 지금 젊은 세대들이 영화 등에서나 간접 체험하는 일들이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대한민국 국민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현실이었다는 얘기다.

이런 공공기관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뀐 것이 언제였을까? 우파 시민들 상당수가 인정하기 싫어하겠지만 바로 1987년의 민주화 투쟁과 그에 이은 6공화국의 성립 이후이다. 공무원들이 민원인을 두려워하게 됐고, 노골적인 뇌물 수수는 상상하기 어렵게 됐다.

그렇다고 우리나라 공무원 사회에서 부정부패가 없어졌다는 얘기는 아니다. 구조적인 비리는 더 심각해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국민들 대다수가 암묵적으로 부정부패를 인정하고 거기 어쩔 수 없이 가담하는 현상은 보기 힘들어졌다. 이상주의자들은 근본적인 변화가 없다고 비관론을 펼칠지 모르지만, 역사에서 100%는 없는 법이다. 비리를 저지르는 위험 부담과 비용이 커지는 것 자체가 역사적 진보이다.

얼마 전 삼성전자가 영국에서 갤럭시 스마트폰 광고를 냈다. 새벽 2시 텅빈 도시의 거리를 젊은 여성이 혼자 조깅하는 컨셉이었다. 이 광고는 영국에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젊은 여성이 새벽 2시에 혼자서 도시의 거리를 조깅한다는 게 말이나 되느냐, 지나치게 비현실적이고 여성 안전에 둔감하다는 비판이었다. 삼성전자는 논란을 의식해 사과하고 이 광고를 내렸다.

이 문제는 다른 나라에서도 논란이 됐다. 한국에서 여성들이 과연 저렇게 새벽 거리를 마음 놓고 다닐 수 있느냐를 놓고 온라인 토론이 진행된 것이다. 한국에서는 심지어 여성들이 혼자서 캠핑을 다니기도 한다는 얘기가 나오면서 ‘믿을 수 없다’는 반론이 나왔다. 급기야 미국의 젊은 여성 유튜버가 직접 한국에 와서 캠핑을 하면서 ‘한국에선 젊은 여성이 안전하게 캠핑을 하는 게 일반적’이라는 보고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우리나라 젊은 여성들이 안전하게 밤의 길거리와 캠핑을 다니는 사회적 분위기 역시 그렇게 오래된 것은 아니다. 21세기 들어와 보편화된 현상인 것으로 봐야 한다. 역시 보수 시민들은 인정하기 싫겠지만 이것도 민주화와 그로 인해 촉발된 열린 사회의 전개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보다 인간적인 삶, 약자에 대한 배려, 공감의 강조 등이 민주화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 혜택을 입고 있다.

우파들이 강조하는 경제 개발이나 산업화 등도 사실은 이런 인권과 열린 사회로의 진전 없이는 일정 단계 이상의 성취가 불가능하다. 인권이 강조되는 열린 사회,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장이 이루어질 때, 보다 다양한 재능이 노동 현장과 기업 활동에 투입되고 이는 결국 생산력의 발전으로 이어진다. 사회의 발전은 항상 다양성의 확대를 요구하며 이는 근본적으로 자유의 확대를 통해 가능해진다.

또 다시 5.18이 다가온다. 5.18이 좌파의 상징자산으로 여겨져 반대한민국의 가치를 전파하는 도구로 악용되어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파 시민들이 5.18과 나아가 광주와 호남에 대해 이를 가는 것도 심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소아병적인 시각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도, 좌파와의 대결에서 승리할 수도 없다.

5.18은 민주화를 향한 거대한 투쟁과 희생이었으며 현재의 대한민국을 만든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민주화는 건국과 산업화를 잇는, 우리나라 근대화의 완성이라는 성격을 갖는다. 5.18을 우파의 상징자산으로 적극 수용하려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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