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5.15' 61주년...'박정희가 옳았다' 저자가 말하는 '5.16'

세계사에서 드문 경제성장·자유민주체제 토대 만들어
이승만과 더불어 유사 이래 가장 뚜렷한 '진보 정치인'

 
올 2월 <다시 근대화를 생각한다>를 펴낸 이강호 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박정희가 옳았다’ 2부에 해당한다.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박정희의 경제적 업적을 인정하는 이들조차 흔히 ‘독재는 잘못했다’고 말한다. <박정희가 옳았다>의 저자 이강호(필명 59세) 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에 따르면, 박정희에 관한 이런 통념은 "모순적이고 무지하며 비겁하다." 그의 2019년 저작 <박정희가 옳았다>는 우리사회의 균형추를 잡기 위한 국민적 필독서라 할 만하다.

지난 2월 나온 <다시 근대화를 생각한다>는 그 2부에 해당한다. 며칠 전 61주년 5·16을 앞두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저자의 입장이 재천명됐다. 그는 최악의 여건에서 세계사적으로도 드문 경제성장으로 자유민주체제의 영속을 위한 물적 토대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박정희를 "자유민주주의 수호자"로 본다.

1960년에만 남파간첩이 100명 넘게 체포됐고 ‘통일운동’ 한다는 인사들의 월북 시도가 이어졌다. 1961년 3월엔 시위자들이 장면 총리 집으로 몰려가 ‘미군 철수’ ‘김일성 만세’를 외쳤다. 박정희 체제는 ‘상시적 비상체제’일 수밖에 없었다. 닉슨 독트린(1969)과 주한미군철수론 같은 안보위기 요인의 상존, 인도차이나 공산화, 대내적으론 "이면에 좌익이 도사린 저항운동"이 계속됐다.

저자는 5·16(1961년)을 "근대화혁명"으로, 10월유신(1972년)을 "공산주의와의 대결 속에 실력 배양을 위한 ‘중단없는 전진’을 재결의한, 또 한 번의 5.16"이라고 정의한다. 실제 10월 유신을 거쳐, 남한의 국력이 북한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저자는 "한강의 기적 당시 우리에겐 ‘상무(尙武)정신·기업가정신·자조정신’이 하나"였음을 강조하며, 안팎으로 큰 위기가 몰려오는 오늘날 무엇보다 "박정희 정신의 현대적 부활"의 절실함을 역설한다. 박정희 산업화는 단순한 경제건설이 아니라, 일본근대( 및 그 업그레이드 버전 만주근대)에서 배운 ‘근대화’의 압축형 리메이크였다. 이승만과 박정희가 우리 역사 최고의 ‘진보 정치인’이라는 게 저자의 평가다.

한 때 사회주의를 꿈꾸며 학생운동에 투신했던 저자의 이력이 그의 언설과 결론의 무게를 더한다. 냉전 종식과 시작된 그의 전향은 15년간 격렬한 내면적 격투와 함께 이뤄졌다. 그 여정이자 결론의 기록 <박정희가 옳았다>에서 저자는 "독재가 없었다면, 10월 유신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대한민국도 존재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무겁게 일깨우며 논증한다. "박정희의 모든 결정적 순간은 ‘해야 할 일’을 외면하지 않은 비르투스(‘용기’라는 덕)적 결단", "유신은 헌정 유린이 아니라 수호를 위한 조치였고 자유와 번영으로의 ‘중단 없는 전진’이었다." 1965년 박정희의 한일협정 타결 또한 이승만이 이끌어낸 ‘한미동맹’ 버금가는 업적으로 본다. 산업화에 필수불가결한 투자·기술이전 등의 협력을 끌어낼 수 있었다.

성역화된 ‘민주화’의 실체에 관한 저자의 증언 또한 이 책의 또 다른 진가다. "반유신 진영 모두가 좌익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민주화라는 깃발의 이면에서 좌익이 자라날 수 있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중에 알려진 알렉산더 푸자노프 평양주재 소련대사의 기록에 따르면, 4.19 직후 김일성은 북한 주도의 적화통일이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대남전략을 본격화했다.

6.25 이후 숨죽어 있던 좌익이 다시 기세를 펼쳤고, 그 상태가 지속됐다면 자유민주 체제는 궤멸됐을 것이다. 1961년 5월 13일 4만여명의 시민·학생들이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를 외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계속 시위가 예정돼 있었으나, 5·16 때문에 무산됐다.

(이강호, 2019).
(이강호,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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