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50년대 초반부터 南여야 정치권, 육·해·공군 공작... 북한칼럼
北, 50년대 초반부터 南여야 정치권, 육·해·공군 공작... 북한칼럼
  • 유진
  • 승인 2018.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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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50년대 초반부터 南여야 정치권, 육·해·공군 공작』

유진 북한문제 전문칼럼니스트

휴전을 전후한 1950년대 북한의 대남공작은 김일성이 미국의 고용간첩으로 몰아 숙청한 구 남로당 지도부의 잔재 및 여독 청산을 위한 대대적인 공작조직 개편과 함께 간신히 존재를 유지하고 있던 남한지역 유격대 수습, 파괴된 지하당 재건 등에 주력한 것이 특징이다.

이와 함께 전후 남한의 혼란한 정국을 이용해 과거 해방공간에서 활동했던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을 포섭하고 이들을 내세워 진보정당을 창당하는 공작도 추진했다. 물론 이러한 공작은 대부분 남한에 연고를 둔 남한출신들 공작원들을 활용해 전개되었다.

◇남로당 숙청하고 대남공작부서 전면 개편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북한지도부는 1953년 3월부터 6개월 동안 구 남로당지도부를 숙청하고 노동당 중앙위원회(중앙당) 대남공작부서인 연락부를 전면적으로 개편했다. 사실상 연락부라는 명칭만 그대로 두었을 뿐 완전히 해체하고 새로 만드는 수준의 개편작업이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연락부장을 수시로 교체하고 조직기구를 끊임없이 개편하는 등 전후의 복잡한 환경에서 대남공작을 보다 공격적으로 전개하기 위한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하였다.

무엇보다 김일성은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일주일 남짓 지난 1953년 8월 5일 당중앙위원회 제6차 전원회의를 열고 '남로당계반란음모사건'을 들고 나와 이를 정당화하며 주영하와 장시우 등 9명의 간부들을 남로당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숙청하였다. 이와 함께 기존의 ‘북조선혁명기지노선'에 기초한 대남 적화통일 의지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앞줄 오른쪽 세번째가 홍명희, 네번째가 김일성 수상, 다음이 박헌영(부수상겸 외상)이다. 김일성 바로 뒤쪽 왼쪽부터 주영하 장시우의 얼굴이 보인다.

◇연락부장에 갑산파 박금철 임명

갑산파(甲山派)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있던 정치 파벌이다. 갑산파의 명칭은 지명에서 따온 것으로, 보천보 전투가 일어났던 함경남도 갑산군의 명칭에서 비롯된 것이다. 갑산군은 현재는 량강도에 속해 있다.

김일성은 1953년 5월~1959년 2월까지 5년 남짓한 기간에 중앙당 연락부장을 4명이나 교체하는 등 대남공작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김일성의 각별한 관심은 남로당계 숙청으로 공석이 된 중앙당 연락부장에 자신의 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갑산파 출신의 공산주의자 박금철을 임명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전쟁이 끝나기 전인 1953년 5월 연락부장에 임명한 박금철이 1954년 11월까지 1년 반 정도 하다가 중앙당 조직부장으로 승진 이동하자 그 후임으로 소련파출신으로서 내무성 부상 겸 정보국장을 역임하던 박일영을 연락부장에 임명하였다. 박일영도 1년 반 정도 하다가 1956년 4월 불가리아 대사에 임명되면서 그만두게 되자 그 자리에 과거 5호실 실장을 거쳐 중앙당 사회부장을 역임했던 임해를 임명하였다.

임해는 약 3년 정도 연락부장 업무를 수행하다가 1959년 2월 중순에 연락부 부부장이었던 어윤갑이 연락부장으로 승진 임명되면서 그만두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김일성이 대남공작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졌느냐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중앙당 연락부의 조직체계도 수시로 개편하였다. 제1공작부문과 제2공작부문을 제1공작부문으로 통합해 당조직 공작부문으로 개편했다. 또 제3부문인 특수공작 부문을 확대 개편하여 남한의 여당과 야당, 정권에 대한 공작을 동시에 담당하도록 했다.

국군공작도 육군과 해군, 공군 등 군종별 담당인원을 대폭적으로 증원시켜 연락부 제2공작부문으로 개편했다. 그리고 1955년 초에 이르러서는 제4공작부문인 해외 우회공작 부문에 대한 조직구성을 마무리했다.

이와 함께 1956년 중반기에 중앙당 연락부 산하 연락소 가운데 서해안으로의 침투를 담당하던 황해도 연안연락소를 폐지하고 해주연락소를 신설했으며 그 소속으로 연안과 옹진 등에 전투방향을 다시 내오도록 하였다.

또한 동해안으로의 침투를 담당하던 강원도 고성연락소를 폐지하고 원산연락소를 신설하였으며 그 산하에 고성, 청석, 고저 전투방향을 신설하였다. 그리고 육상부문의 평강연락소(강원도) 산하에 3개 전투방향과 개성연락소 산하에 2개 전투방향도 신설하는 등 연락소들을 확대하였다. 당시에 조직된 연락소의 명칭이나 조직체계가 노동당 작전부로 이관되어 1990년대까지 대부분 그대로 존재했다는 것이 전직 대남요원들의 진술이다.

◇58년 말부터 동베를린에 해외공작연락소 설치

이 시기 해외공작 부문에서는 중국 광동성에 연락소를 신설하여 홍콩, 마카오를 통한 해외침투 및 공작을 전담하도록 했다. 1958년 말에는 독일 동베를린(일명 동백림)에 해외공작 연락소를 설치하고 체코 프라하에는 출판물 선전거점을 신설하였다.

이와 함께 노동당 산하에 새로운 대남공작기구와 공작원 양성기관 설립도 연이어 추진하였다. 먼저 1956년 4월 노동당 정치위원회 결정으로 노동당 중앙위원회(중앙당)에 문화부를 신설하였다. 이때 신설된 중앙당 문화부는 직접적인 대남공작은 하지 않고 대남 정치선전선동 및 남한과 해외 자료 조사연구, 일본 조총련에 대한 지도 등을 전담했다.

그리고 1959년 12월에는 문화부 산하에 남한과 해외의 정치, 경제, 군사, 사회 등 전 분야에 대한 조사와 대남정책 수립에 필요한 자료들을 전문적으로 조사 분석하고 연구하는 ‘남조선연구소’를 신설하였다. 초대 남조선연구소장에는 저명한 사회경제학자였던 김광식을 임명하였다.

또한 노동당 중앙위원회에 대남공작 지도부와 한국현지 지하당 조직 및 대남 침투요원들과의 연락을 전담하는 통신부를 신설하였다. 중앙당 통신부는 대남연락 임무는 물론 대남공작원들과의 무전통신 연락에 필요한 무전기의 개발과 훈련, 암호체계 개발 등 실제적인 통신연락을 보장하는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각 방송과 공개 및 비공개 무전통신 내용을 감청해 분석하고 그 결과를 연락부와 문화부 및 그 산하기관에 배포해 활용토록 하는 임무도 수행했다.

yj@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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