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A 증언】박정희 승용차에 수류탄을 투척하고 암살하라!
【CIA 증언】박정희 승용차에 수류탄을 투척하고 암살하라!
  • 마이클 리
  • 승인 2018.07.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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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리는 502군사정보단에 근무하면서 송추 무장공비 사건, 거물간첩 황태성 사건, 무장간첩 김동기 사건, 실미도 사건 등을 직접 조사했다.

CIA에 들어간 후 북한 관련 정보를 수집했다. 이를 위해 그는 유럽 등 전 세계 24개국에서 파견생활을 했다. 한국에서도 86년부터 95년까지 근무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신상옥-최은희 부부, KAL 858 폭파범 김현희씨, 황장엽 선생 등을 직접 만나 조사했다.

『이제는 말 할 수 있다』

1965년 송추 무장공비 사건

1965년에 서울 시경이 북한간첩 한 사람을 체포했는데 이 사람이 전향하여 대북 역 공작에 적극 협조했다. 그는 북한에 계속 암호통신을 보내며 남한에서 그가 부여받은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고했다.

서울 시경은 이 간첩을 통해 서울 북방 송추 유원지 금수장 앞에서 1965년 7월 18일 북한이 파송하는 3인조 무장간첩들을 접선하도록 공작을 추진했다. 이때 서울 시경의 대공요원들이 잠복해 있다가 무장간첩들을 덮쳤다.

그 때 북한간첩들이 저항해 교전이 벌어졌고 서울 시경 대공요원 두 사람이 전사했다. 3인조 간첩들 중에 한사람은 생포되고 두 사람은 몸에 심한 총상을 입은 채로 도주하여 북한으로 돌아갔다.

생포된 자의 이름은 조장 대위 <노성집>이고 도주한 자들은 조원 대위 <이재영>과 대위 <우명훈>이었다. 이 두 사람은 북으로 돌아간 후에 병원치료를 받고 소위 ‘공화국 전투영웅’ 칭호와 각각 육군 대좌와 상좌 계급을 받았다.

그들은 2년 후에 평양시 근교 상원군 공포리에 ‘124 군부대’를 창설했다. 생포된 노성집은 서울 대방동 수용소에 후송되었고 내가 그를 3개월간 심문했다. 당시 국내에서는 언론에서 <이재영>을 <이재용>으로 <우명훈>을 <우명환>으로 보도한 예도 있었으나 내가 여기에 기술한 이름이 정확한 이름이다. 이 3인조 간첩들의 공작임무는 서울 시내에 잠입하여 적절한 기회를 포착하고 박정희 대통령이 타고 가는 승용차에 수류탄을 투척하여 그를 암살하는 것이었다.

수용소에 도착한 노성집은 초기에 아주 뻣뻣하게 굴었고 비협조적이었으나, 날이 가면서 심문관으로부터 북한에 관한 이야기, 남한에 관한 이야기 등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많이 들은 다음에, 완전히 전향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대한민국에 죽을 죄를 지은 것을 통한히 여기면서 적극 협조했고 그로부터 방대한 분량의 정보가 쏟아져 나왔다. 그는 비록 북한 간첩으로 남한에 침투했지만 인간적으로 존경할만한 교양과 지성을 겸비했고 적극적으로 심문에 협조했기 때문에 심문관들이 건의해서 수용소에서는 그를 특별히 대우했다. 우리는 토마토 화분 두

개를 사다가 그에게 주고 매일 물을 주게 하고 자유롭게 수용소 안 뜰을 걷고 바람을 쏘이게 했다.

심문이 끝나고 그가 수용소를 떠날 때 한미합동 심문관들이 강력한 탄원서를 한국정부에 보내어, 그의 죄과를 관대히 용서하고 대공 업무에 고문으로 채용해 줄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그 당시 정치 분위기는 박정희 대통령의 불편한 남로당 전력과 거물간첩 황태성 사건으로 인하여 관용을 기대하기가 아주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결국 처형 되었고 죽기 전에 천주교에 귀의했기 때문에 천주교 묘지에 안장되었다. 황태성 사건이란, 황태성이 1961년 5.16혁명 직후 9월 1일에 서울에 잠입하여 박정희와 김종필을 만나라는 임무를 수행하려다 그해 10월 20일에 체포되고 1963년 12월 14일에 처형된 사건이다.

mlee-cia@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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