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A 증언】황태성은 밀사인가 거물간첩인가?
【CIA 증언】황태성은 밀사인가 거물간첩인가?
  • 마이클 리
  • 승인 2018.07.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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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리는 502군사정보단에 근무하면서 송추 무장공비 사건, 거물간첩 황태성 사건, 무장간첩 김동기 사건, 실미도 사건 등을 직접 조사했다.

CIA에 들어간 후 북한 관련 정보를 수집했다. 이를 위해 그는 유럽 등 전 세계 24개국에서 파견 생활을 했다. 한국에서도 86년부터 95년까지 근무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신상옥-최은희 부부, KAL 858 폭파범 김현희씨, 황장엽 선생 등을 직접 만나 조사했다.

 

"황태성은 남북협상 밀사로 자처했지만, 김일성은 황태성에게 박정희와 나를 만나서 북한에 합류하도록 설득 공작을 해보라는 밀명을 내렸던 것이다... 나는 황태성을 큰 간첩으로 취급했고 혁명 과업에 장애가 된다고 판단, 그 문제를 빨리 없애버려야 했다. 박정희 의장의 정체가 의심받을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 김종필의 증언
1928년 황태성

【CIA 마이클 리, 이제는 말 할 수 있다】

1961년 5.16 군사혁명 직후에 북한 김일성은 남한 군사혁명의 주도세력이 남로당 전력이 있는 박정희라는 사실에 착안하여 황태성을 서울에 급파하고 박정희와 김종필을 만나서 ‘연방제 평화통일’의 남북협상을 위한 사전 조율과 가능성을 타진하라는 임무를 부여했다.

황태성은 1945년 8.15 광복 후 조선공산당 경북도당 조직부장으로 있다가 1949년 10월 1일 대구 폭동을 총지휘했고 월북하여 무역부 부상까지 역임했다. 그는 대구 폭동에 가담했다가 사살된 박정희의 친형이며 김종필의 장인인 박상희와 절친한 사이였다.

그가 1961년 5.16 혁명 직후 9월 1일에 서울에 다시 잠입하여 박정희와 김종필을 만나라는 임무를 수행하려다 그해 10월 20일에 체포되었다. 그는 고 박상희의 미망인 조귀분여사와 박정희의 대구사범 동기동창인 고대 교수 왕학수에 접근해 박정희와 김종필을 만날 수 있도록 가교 역할을 부탁했으나 조귀분 여사의 신고로 체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당시 야당과 일부 언론에서는 박정희와 김종필이 황태성을 여러 번 은밀히 만났고 그를 김일성이 보낸 간첩이 아니라 밀사로 인정을 했으며 그가 가지고 온 공작금 20만 달러가 공화당 창당 준비자금으로 사용되었다는 의혹을 제기했으나 확인된바가 없다.

재판 과정에서 확인된 사실은 황태성이 가지고 온 돈은 2천 몇백 달러에 불과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한때 남로당에 가입했던 전력 때문에 두고두고 괴로움을 당했으며 1948년 11월에는 집중적인 조사를 받았다.

◇박정희 군부 내 남로당원 명단 제공하고 면죄부

그때 박정희는 대한민국 군부 내에 포진되어 있는 남로당원들의 명단, 소위 ‘박정희 리스트’를 제공해 그들을 일망타진하는데 크게 공을 세워 남로당 전력에 대한 면죄부를 받았다. 그래서 그는 5.16 군사혁명을 성공시킨 후에도 그의 어두운 과거의 이미지를 일소하기 위해 혁명공약에서 ‘반공을 국시의 제1조로 한다’고 강조했다.

황태성이 체포된 후 그는 분명히 한미양해각서 ‘미8군 정보훈령 I-65’에 의거 48시간 이내에 대방동 수용소에 후송되어야 했는데 당시의 정치적인 민감성 때문에 한국 중앙정보부가 단독으로 관리했고 내가 근무하던 미502 군사정보단은 접근도 못했다.

그러나 주한 미국대사관과 미8군 G-2의 강력한 반발로 딱 1주일간의 접견 승낙을 받고 대방동 수용소가 아닌 서울시내 모처에 가서 내가 그를 만났다. 나의 심문 방향은 그의 상세한 공작임무 내용과 그와 박정희와 그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종필과의 관계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아직도 국내 좌경인사들이 황태성은 간첩이 아닌 밀사였으나 박정희의 정치적인 약점을 은폐하기 위하여 처형되었다고 고집하는 것이다. 그가 북에서 파송한 밀사였다면 떳떳하게 박정희나 김종필을 직접 만났어야 했다.

한국정부도 사전연락을 받고 그를 공개적으로 또는 비공개적으로 만났어야 했다. 그러나 황태성은 다른 간첩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은밀히 침투 했으며 제 삼자를 통하여 박정희나 김종필에게 접근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가 세탁소에 맡긴 저고리 속주머니에서 간첩용 난수표가 발견되어 세탁소 주인이 당국에 신고한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황태성 저고리 속주머니서 나온 간첩용 난수표

그는 진정한 의미의 남북통일이나 민족통일을 위한 임무로 남파된 것이 아니었으며 5.16 혁명의 주도세력인 박정희가 남로당 전력이 있는 것을 이용하여 박정희가 아직도 과거의 박정희라고 믿고 김일성이 원하는 적화통일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서 잠입한 것이었다.

그는 분명히 북한 ‘간첩’ 이었다. 이 모든 것이 민족분단의 비극이다. 황태성은 체포된 후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 하다가 1963년 12월 14일에 인천에 있는 모 군부대 형장에서 총살형으로 처형되었다. 그리고 사흘 뒤인 1963년 12월 17일에 당시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이던 박정희가 제3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2015년에 중앙일보가 김종필 증언록 (회고록 笑而不答)을 연재하면서 황태성 문제가 다시 화두에 떠올랐다. 그 때까지도 좌파세력들의 집요한 억지주장으로 황태성이 과연 북에서 파송한 밀사였느냐 아니면 남파된 간첩이었느냐를 놓고 명쾌한 결론이 없는 상태였다.

마침 필자가 서울에 있을 때인데 중앙일보 기자들이 접근하여 나의 판단을 물었다. 나는 분명하게 황태성은 북한이 밀파한 거물간첩이었다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해명했다. 중앙일보는 다음날 기사에서, ‘미국정부 측 심문관의 해명’ 을 인용해 황태성은 틀림없는 북한의 간첩이었다고 보도했다.

mlee-cia@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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