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자리를 잡은 국영가스업체 가스프롬 본사 건물의 회사 로고. 가스프롬은 지난달 27일(현지시간)부터 폴란드와 불가리아에 천연가스 공급을 완전히 중단했다. /EPA=연합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자리를 잡은 국영가스업체 가스프롬 본사 건물의 회사 로고. 가스프롬은 지난달 27일(현지시간)부터 폴란드와 불가리아에 천연가스 공급을 완전히 중단했다. /EPA=연합

이탈리아 최대 에너지업체 에니(Eni)는 17일(현지시간) 러시아산(産) 가스 대금을 결제하기 위해 러시아 가스프롬 은행에 루블화 계좌를 개설한다고 밝혔다. 또 한번 서방의 제재가 무력해진 모양새다.

러시아 가스프롬 은행 계좌에 유로화로 대금을 납입하고 은행 측에서 이를 루블화로 바꿔 러시아 국영 가스회사 가스프롬으로 이체하는 방식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당국의 동의 아래 관련 절차를 진행 중이며, 러시아에 대한 국제 제재 틀에 배치되진 않는다는 게 에니의 입장이다. 송장발행과 대금결제는 계속해서 유로화로 이뤄지도록 러시아 당국의 확인을 받았다는 설명도 이어졌다.

안사(ANSA) 통신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에니는 이날 러시아 정부가 제시한 새 대금 지급 절차를 준수하기 위한 예방 조처로 가스프롬은행에 2개의 계좌를 개설하는 절차를 시작했다. 임박한 대금결제 시한을 고려한 것이다. 유럽 내 러시아산 가스 최대 수입업체 가운데 하나인 에니의 다음 가스 대금 결제일은 이달 20일께로 알려졌다. 2개의 계좌, 각각 유로화用과 루블화용이 존재하게 됐다. 루블화 계좌명 ‘Z’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지지하는 선전 상징 ‘Z’와 통한다.

앞서 러시아 정부는 유럽연합(EU) 회원국을 포함한 비우호국에 대해 4월 1일부터 가스 구매 대금을 루블화로 결제하도록 하는 대통령령을 공포했다. 그러나 실제론 결제를 유로화도 가능하도록 해 자금을 확보하고 있다. 에니 측은 대금 입금을 유로화로 하는 데다, 환전 역시 서방권 제재 대상인 러시아 중앙은행이 아닌 다른 금융기관에서 처리된다며 문제가 없다는 판단이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이날 역내 업체들이 기존 계약서에 합의된 통화(유로 또는 달러)로 가스 대금을 지불하고 해당 통화로 거래가 완료됐다고 신고하는 한, 제재 위반이 아니라는 지침을 공개했다.

주요 7개국(G7)과 러시아 석유 수입금지가 합의를 이루지 못하면서 서방의 제재에 구멍이 속출하고 있다. 미국은 러시아산 석유 금수 조치 대신 가격상한제·관세부과를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러시아가 챙길 수익을 줄이겠다는 계산이지만, 미약한 조치란 지적이 나온다. 러시아는 현재 에너지 수출로 하루 10억 달러(약 1조2700억원) 정도를 벌어들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이 러시아에 대한 또 다른 압박조치를 내놨다. 다음 주부터 러시아의 국채 원리금 상환을 차단해 디폴트(채무불이행)를 부추길 방안을 추진한다. 미 재무부는 올해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러시아 재무부·중앙은행·국부펀드와 거래를 전면 금지해 디폴트 상황을 유발했다.

러시아의 채권 원리금 상환을 강제로 막게 되면, 또 다시 디폴트 우려가 커지고 시장 불안이 조성될 게 뻔하다. 피해는 오롯이 미국 등 서방 채권자들에게 돌아가면서, 결국 전 세계경제에 역풍을 몰고 올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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