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조 심문했었지"... CIA 마이클 리(상)
"김신조 심문했었지"... CIA 마이클 리(상)
  • 마이클 리
  • 승인 2018.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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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박정희 목을 따러 왔수다”

자해 소동으로 24시간 수갑 채우고 특수 장비로 감시
체포 당시 김신조

공병 가위로 DMZ 철조망 끊고 걸어서 청와대까지 침투한 김신조

우리 피해자만도 26명 사망, 66명 부상

1965년 송추 무장간첩사건 때 서울시경 대공요원들이 덮친 3인조 간첩들 중에 한 명이 생포되고 두 명이 심한 총상을 입은 채로 북으로 도주하였는데 그들의 이름은 <이재영>과 <우명훈>이라고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들이 2년 후인 1967년 4월에 평양시 근교 상원군 공포리에 인민군 총참모부 정찰국 소속으로 <124 군부대>를 창설했다. 이 부대는 전국 군부대 내에서 사상이 투철하고 신체 강인한 2,400명의 병력을 차출하고 각 300명씩 8개 기지로 분리하여 위에서 말한 평양 근교 상원군과 황해북도 연산군에서 대남공작 특공대로 비정규전 유격훈련을 실시했다.

그 후 북한에서는 대대적인 대남 기습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 작전계획에 참여한 인물들은 김창봉 민족보위상, 최광 인민군 총참모장, 오진우 인민군 총정치국장, 허봉학 노동당 중앙위원회 대남사업총국장, 김정태 총참모부 정찰국장, 이재영 124 군부대장, 그리고 우명훈 제6기지장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황해북도 연산군에 있는 제6기지를 일차적으로 남파할 것을 결심하고 대원 76명을 뽑았다. 그들을 5개조로 구성하여 제1조는 청와대, 제2조는 미국대사관, 제3조는 육군본부, 제4조는 서대문 교도소, 그리고 제5조는 서빙고 보안사 분실을 기습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황해도서 북한인 12명 사살 뒤 남조선 소행으로 위장

그러나 상부지시로 취소하고, 김신조를 포함한 31인조로 축소해 청와대 기습작전만을 실시하기로 최종결심했다. 그 후 이 31인조는 즉시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세우고 실전예행연습을 하였는데 사리원에 있는 황해북도 인민위원회 청사를 사전예고 없이 기습하여 12명을 사살하고 남조선 간첩들의 소행이라고 위장하였다.

소위 <김신조 특공대> 31인조 무장공비는 1968년 1월 13일 정찰국장 김정태의 명령을 받고 황해북도 연산군 제6기지를 떠나 1968년 1월 17일 밤중에 비무장지대 (DMZ)를 통과하고 미2사단 전방 고랑포 부근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 철조망을 공병 가위로 절단한 후 남한 땅에 침투했다.

그들은 국군복장을 하고 야간에만 이동을 계속하여 1968년 1월 19일 오후 2시에 삼봉산에 도착했을 때 법원리 부락민 나무꾼 네 사람과 조우했다. 김신조 일행은 이들을 죽일까 살릴까 토의하다가 얼어붙은 땅을 파고 시체를 매몰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나무꾼들에게 “곧 남조선에서는 반란이 일어나고 공산주의가 승리하는 세상이 된다”고 말하고 절대로 경찰에 신고하지 않겠다는 조건부로 돌려보냈다.

◇법원리서 만난 나무꾼 4명 살려줘

그러나 저들은 하산하자마자 법원리 창현경찰서에 신고를 했고 경찰과 국군25사단 병력이 동원되어 수색작전을 개시했다. 그 후 31인조 공비들은 노고산을 넘어 20일 아침 7시에 비봉산에 도착했다.

거기서부터는 공비들이 2인조 3인조로 분산하여 이동하다가 승가사에서 재집결하고 1월 21일 저녁 8시에, 청와대에서 불과 800미터 떨어진 청운동 세검정 고개까지 접근했다. 그때까지 도중에서 경찰과 군인들을 만났어도 공비들이 국군복장을 했고 특수훈련을 마치고 귀대하는 방첩대라고 속여 아무 마찰이 없었다. 공비들이 세검정고개 자하문을 지나려고 할 때 신고를 받은 종로경찰서 수색대가 도착해 불심검문하게 되었다.

그 때 경찰 수색대를 진두지휘하던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이 국군복장을 한 공비들의 소속과 신분을 확인하려고 할 때 공비들이 뻣뻣하게 대답하며 소속과 신분이 궁금하면 자기들의 부대까지 동행하자고 했다.

◇아! 최규식 총경

직관적으로 이들이 수상하다고 느낀 최규식 총경이 권총을 빼 들었다. 그때 마침 77번 노선 시내버스가 헤드라이트를 켜고 세검정 고갯길로 올라오고 있었다. 공비들은 이 버스를 수색대 지원 병력으로 오인하고 순간적으로 소지하고 있던 기관단총을 발사하고 수류탄을 투척하여 최규식 총경과 옆에 있었던 정종수 경사가 전사하고 버스에 타고 있던 승객들 중에 여러 사람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

이렇게 해서 공비소탕작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초전에 공비 5명이 사살되었다. 나머지 인원들은 흩어져 인왕산, 비봉산, 의정부 일대로 도주했다. 국군6사단 병력이 동원되어 저들을 추적하던 중에 1월 22일 새벽 3시에 <김신조>가 인왕산 근처 민가에 숨어 있다가 생포되었다.

그는 수색대원들에게 발각되자 수류탄으로 자폭하려고 했으나 수류탄이 불발했다. 그 후 소탕작전이 서울북부 경기도 일대에서 1월 31일까지 계속되었다. 31명 공비들 중에 생포된 김신조 외에 1명이 자폭했고 28명이 사살되었으며 한명은 살아서 북으로 도주하였다.

이 때 31인조 공비들이 소지한 무기는 기관단총 31정, 실탄 9,300발, TT권총 31정, 대전차 수류탄 252발, 방어용 수류탄 252발, 그리고 단도 31개 이었다. 남한 측 피해자는 군경민 합해서 26명이 사망하고 66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사망자 중에는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과 15연대장 이익수 대령이 포함된다. 그리고 소탕작전에 동원된 병력은 군경 합해서 총 19,213명이었다. 김신조는 생포되던 날 1월 22일 오후 7시에 수갑을 채운 채로 기자회견에 나왔다.

청와대 뒷 산에 남아있는 '김신조 사태'의 흔적

◇“나는 박정희 목을 따러 왔수다”

기자들이 묻는 질문에, “나는 박정희의 목을 따러 왔수다” 하며 기세 등등했다. 자기는 26세, 생년월일은 1942년 6월 2일, 본적은 함경북도 청진시 청암동, 소속은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정찰국 124군부대 제6기지, 육군소위, 부모는 직조공장 노동자 김중엽과 이분옥이고, 아래로 세 명의 여동생이 있다고 진술했다.

그리고 이 공비소동기간 중 1월 23일에는 원산 앞바다 공해상에서 미국해군의 정보수집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푸에블로호(Pueblo)호가 북한에 납치되었다. 이 사건 이후에 남한에서는 북한의 비정규전에 대비하기 위하여 1968년 4월 1일에 250만의 향도예비군이 창설되었다.

또 155마일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 전역에 새로운 철책이 설치되었다. 미국공군의 최신예기 ‘팬텀’이 한국공군에 배치되었고, 미국정부는 한국정부에게 군사원조 1억 달러를 추가로 긴급지원했다. 그 당시 한국의 연간수출총액이 3억2천만 달러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금액이었다.

생포된 김신조는 공비소탕작전이 끝난 후에 대방동 수용소에 후송되었다. 그곳에서 내가 그를 4개월간 심문했다. 그는 북한에서 교육받은 그대로 철두철미하게 남한에 대한 적개심에 불타고 있었으며 매사에 반항적이었고 비협조적이었다.

◇자해 소동으로 24시간 수갑 채우고 특수 장비로 감시

그는 체포될 때 자폭하지 못한 것을 원망스럽게 생각했고 청와대 기습작전에 실패한 것을 <위대한 수령 김일성>에 대한 무한한 불충으로 생각했다. 그의 반항적인 태도 때문에 나는 그를 1주일간 이상 정상적으로 심문을 할 수가 없었으며 그를 회유하고 설득하는 일에만 신경을 썼다.

그는 자결하겠다고 식사를 거부했고 수용소 감방 벽에 머리를 부딪히고 손목 혈관을 이빨로 물어뜯고 온갖 소동을 벌였다. 수용소 측에서는 그의 자해를 막으려고 감방 바닥과 사면 벽을 모두 ‘매트리스’로 덮고 24시간 수갑을 채운 채로 특수 감시 장비로 감시했다.

그가 기진맥진하여 더 이상 반항할 체력이 없어졌을 때 나는 침착하게 그에게 접근하여 “자네가 죽기는 왜 죽어” 하면서 인간생명의 존엄성과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이 꼭 하나 남아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진실을 알아야 하고 또 진실을 말해야 하는 것”이며 그 다음엔 죽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사람이 사내자식으로 태어나서 “내가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왔으며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허실인지 알기도 전에”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비겁하고 무책임한 일이라고 설득했다. 이 말에 수긍이 가는지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입을 다문 채로 내 말을 계속 듣기만 했다.

<하편에 계속>

mlee-cia@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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