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조를 심문해보니(하)
김신조를 심문해보니(하)
  • 마이클 리
  • 승인 2018.07.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정일 특사로 송이버섯 가져온 박재경, 사실은 청와대 습격 생환 공비

김신조가 수그러진 후에 나는 그의 수갑을 풀고 식당에 특식을 주문해서 먹게 하고 본격적인 심문에 들어갔다. “김 군, 자네가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나도 자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한 다음에 무엇이 바른 길인지 판단을 하자.”

이때 김신조는 북에서 배우고 들은 이야기와 자기가 아는 진실이 무엇인지 나에게 설득하려는 마음으로 나와의 대화에 응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날이 가고 그와 나는 인간적인 냄새를 서로 맡으면서, 남북한의 건국과정과 가짜 김일성의 정체와 자유세계의 실정을 이야기하고 들었다.

그는 서서히 새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약 3주 후부터는 수용소를 거쳐 간 많은 사람들 중에 가장 협조적이었던 사람의 하나가 되었고 가장 많은 분량의 정보를 제공했다. 그리고 심문 도중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는 기독교신앙에 대한 이야기했으며 그가 출소하면 꼭 교회에 가겠다고 약속했다.

한국정부는 그가 전향하여 최대한으로 협조를 했고 역사의 산 증인으로 남아 있어야 하기 때문에 1970년에 합법적인 남한주민으로 정착하게 했다. 불행히도 북에 있는 그의 가족은 모두 처형되었다.

◇기독교에 귀의하나, 북의 가족은 모두 처형

그 후 김신조는 영등포구 신길동에 있는 성락교회의 김기동 목사 밑에서 신앙생활을 했고 침례교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남양주 성락교회에서 2009년 까지 시무했다. 그가 생포되었을 당시 자폭하려고 안전핀을 뽑은 수류탄이 불발한 것은 김신조의 선택도 아니었고 수색대원들의 선택도 아니었고 하나님의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비록 무장공비이었지만 그를 살려놓고 사용해야할 하나님의 뜻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김신조가 대방동 수용소에 도착하고 1주일 후에 미8군 G-2 <오란도> 준장과, 나와, 보안사 서빙고분실 보안과장 이학봉 소령이, 김신조를 앞세우고 헬리콥터로 전방에 가서 김신조 31인조가 통과한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 철조망을 조사했다.

철 기둥 북쪽에서 공병가위로 수직 약 1미터가량 자르고 통과한 후 다시 내려놓으면 철 기둥 남쪽 밖에서는 순찰대나 조사관들의 눈에 띄지 않게 되어 있었다. 그때 우리들은 김신조로부터 침투 당시의 상황과 이동과정과 아군경비태세의 허점을 구체적으로 듣고 나는 그 모든 것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우리 일행은 그 지점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미군 GP로 이동했고 쌍안경으로 비무장지대 반대쪽 북한초소의 동향을 감시했다. 그때 또 예기치 못한 참사가 발생했다. 우리가 헬리콥터로 그 초소를 떠난 약 10분후에 북한 초소에서 발사한 포탄에 의하여 우리가 방문했던 바로 그 초소의 근무자 미군들이 폭사하고 부상을 입었다.

참으로 아찔한 사건이었다. 우리가 그곳에 10분만 더 머물렀더라면 우리도 그 참변을 당했을 것이 아닌가. 그때 동행했던 이학봉 소령은 육사 18기생으로 1980년에 국군 보안사령부 (보안사) 대공처장을 역임했고 육군준장으로 예편했으며 1986년에는 국가안전기획부 (안기부) 2차장을 했고 후에 13대 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세월이 많이 지난 후 2004년에 김신조는 놀랍고 새로운 사실을 증언했다.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기습작전을 실패한 후 31인 공비들 중에 살아서 북으로 돌아간 사람이 한명 있었다고 들었는데, 2000년 9월 11일에 김정일 특사로 서울을 방문한 노동당 대남담당비서 김용순을 수행한 박재경 대장이 바로 그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김정일 특사로 송이버섯 가져온 박재경, 사실은 청와대 습격 생환 공비

박재경 대장은 그 당시 인민군 총정치국 부총국장이었으며 김정일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사람들 중에 하나라고 했다. 그는 서울에 왔을 때 신라호텔에서 남측 인사들을 만나고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김하중에게 칠보산 송이버섯을 전달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청와대 기습작전을 실패하고 북으로 도주할 때 노고산에서 추격하는 국군수색대와 교전을 하고 15연대장 이익수 대령을 사살한 장본인이다.

그리고 한국정부가 발표한 내용과 상이한 새로운 사실을 증언한 한 사람이 또 있었다. 2012년 초에 탈북자중 한 사람이 전 인민군 상좌 홍은택 (가명) 인데 그가 124군부대의 후신인 711군부대에서 5년 이상 근무하면서 지득한 내용이라며 김신조와 대면한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기습작전에 파송된 공비는 총 33명 이었다는 것. 그러니까 김신조가 모르는 두 명이 더 있었다는 말이 된다. 김신조는 분명히 처음부터 31명이 떠났고 31명이 같이 행동했다고 언급했다. 그러면 추가적인 두 사람은 동일한 임무를 위하여 별도로 침투했고 별도로 행동했다는 말이 된다.

홍은택의 말에 의하면 그가 711군부대에서 분명히 문헌에서 보았고 부대역사 강의에서 들은 바 그 두 사람의 이름은 임태영과 우명훈 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직접 만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공비들이 서울 청운동 세검정에 도착했을 때 인근 옥상에서 공비들의 후미를 감시하고 주위를 살피는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작전이 실패하는 것을 보고 도주하다가 생포되었다.

1968년 1월 25일 게릴라 시신 공개 때 다른 시
체와 달리 한 시신(회색 원)은 머리 부분에 둘둘만 헝겊이 놓여 있다. 당시 언론들은 이를 ‘머리 없는 시체’로 보도했다.
 오른쪽 물체를 확대하면 잘려진 머리 형상이 보인다. 둘 다 나라기록관 사진이다.

◇공비 2명 생포, 역공작

수색대원들이 그들에게 자수하고 전향하여 국군에 협조하라고 강요하자 거절하니까 수색대가 생포된 다른 공비 한사람을 작두로 목을 참수하는 현장을 보여주고, 그래도 거절하겠느냐 하니까 두 사람이 겁에 질려 대한민국에 충성할 것을 서약하고 대북 역공작 임무를 받은 다음 북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다.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북에 돌아가서 김일성에게 직접 접근할 수 있을 만큼 최대한으로 충성을 다하고 승진하고 있다가 적절한 시기에 남한의 지령을 대기하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말 그대로 북에 돌아가서 충성을 다 했고 각각 상장과 중장까지 진급했으나 그들의 정체가 드러나 1998년에 처형되었다고 한다.

이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으나, 1968년 1월 25일 오후, 수색대의 추격 중에 사살된 공비들의 시신을 경기도 송추초등학교 교정에 모아놓고 김신조가 확인할 때 거기에 목이 잘리어 나간 시신이 하나 있었다. 그런 점으로 보아 위에서 말한 홍은택의 증언에 신빙성이 있다고도 볼 수 있으나, 이 문제는 아직도 한국정부가 확인해야할 숙제로 남아있다.

mlee-cia@jayoo.co.kr

더 자유일보 일시 후원

“이 기사가 마음에 들면 후원해주세요”

  • ※ 자유결제는 최대 49만원까지 가능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