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 온 선교사들, 100년의 이야기] ① 한글과 복음

우리나라 처음 전해진 성경은 한글성경 아닌 한문성경
선교사들 들어오기 전 중국과 일본에서 한글성경 번역
조선 민초들 삶 속 '입말' 익히며 복음 전했던 언더우드

“조선인에 한글도 글이라는 생각 준 것은 예수교회외다”
“한글처럼 기독교 쉽게 전할 수 있었던 언어 없었을 것”

한글 재발견·보급은 복음 빨리 전파하기 위한 ‘고속도로’

[편집자주] 조선 후반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과 전쟁, 그리고 산업화와 민주화에 이르는 근현대사에서 기독교와 선교사들의 업적은 우리 역사의 주류였다. 즉, 기독교 정신이 오늘날 대한민국 건국의 근간이 됐다. 기독교와 선교사들의 활동을 빼고는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논할 수가 없다는 것은 이미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의 전래과정과 선교사들의 업적 및 활동상이 우리나라 역사교과서에는 제대로 소개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에 자유일보는 하나님의 섭리로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 그 복음이 오늘날 ‘초일류 국가 대한민국’으로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었음을 제대로 알리기 위한 사명감으로 이 시리즈를 기획했다.

아펜젤러·게일·레이놀즈 등 선교사들과 한국인 번역위원들. 언더우드는 1887년 성경을 번역 출간하기 위해 한국상설성경위원회를 구성했다.
아펜젤러·게일·레이놀즈 등 선교사들과 한국인 번역위원들. 언더우드는 1887년 성경을 번역 출간하기 위해 한국상설성경위원회를 구성했다.

5백 년을 이어 온 조선 왕조가 쇠망해 가던 19세기 중후반기, 조선은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외우내환의 위기를 맞게 된다. 19세기 중반부터 조선의 연해에 서양의 선박들이 자주 출몰하면서 통상 교역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 그때마다 조선을 빗장을 꼭곡 걸어 잠갔고, 근대 과학기술로 무장한 서양 강대국들은 군함을 몰고 와서 더욱 강하게 개항을 요구하며 압박했다. 

조선의 내·외부에서 터져 나오는 변화를 갈망하는 욕구는 당시 어느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큰 흐름이 되어 있었다. 이미 백성들 사이에서도 근대 의식의 각성이 일어나고 있었다. 백성들의 각성은 곧 언어를 통한 교육으로 가능했다. 여기에는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한글의 우수성이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한글의 재발견과 발전에 크게 공헌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바로 이 땅에 복음을 전파했던 선교사들이었다. 

우리나라에 처음 전해진 성경은 한글로 번역된 성경이 아닌 한문 성경이었다. 영어 성경을 최초로 한문으로 번역한 이는 영국 런던 선교회에서 중국에 파견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로버트 모리슨 이었다. 현재 우리에게 친숙한 성경 단어인 ‘천국’, ‘복음’, ‘사도’ 등의 말은 모리슨 선교사가 처음 한자로 만든 것이다. 성경을 처음 번역하는 일은 그쪽 문화권의 없는 성경적 용어도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매우 고된 작업이었을 것이다. 

모리슨 선교사는 영국 성서공회의 도움으로 1813년 신약성경을 한자로 번역했고, 1818년엔 구약성경 번역을 완성했다. 그리고 이 한문 성경전서를 조선에 전한 이가 영국 군함 암허스트호를 타고 서해안을 탐사한 독일 출신 귀츨라프 선교사다. 그는 1832년 7월에 조서의 해안을 측량할 목적으로 황해도 서해안 최북단 섬인 백령도와 대·소청도에 정박했고, 그때 주민들에게 한문 성경을 건네줬다. 이는 시기적으로 볼 때 토마스 선교사가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평양에 왔던 1866년보다 34년이나 앞선 일이었다. 귀츨라프 선교사는 조선 최초의 선교 사역을 마치고 떠나기 전, 아래와 같은 기도문을 남겼다. 

귀츨라프 선교사와 그의 기도문.
귀츨라프 선교사와 그의 기도문.

“이 모든 일은 내가 늘 기도로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를 간구한 결과 이뤄진 하나님의 역사다. 조선에 파종된 하나님의 진리(복음)는 사라져 버릴 것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머잖아 주님께서 예정하신 때가 되면 많은 결실이 있을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쇄국정책을 제거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이 약속된 땅에 들어가도록 허락할 것이다.”

귀츨라프 선교사의 기도 응답은 놀랍게도 34년 후인 1866년 토마스 선교사를 통해 이뤄졌다.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평양, 대동강변에 정박한 토마스 선교사는 26세의 꽃다운 나이에 제대로 복음 한번 전하지도 못하고, 조선 병사의 칼에 찔려 죽어가는 순간 그 병사에게 던져준 한문 성경으로 복음이 전해졌다. 

◇조선 민초들의 삶 속에 녹아 있는 살아있는 '입말' 익히며 복음 전했던 언더우드

이후 한문 성경이 한글로 번역된 것은 놀랍게도 비슷한 시기의 중국과 일본에서다. 즉, 이 당에 복음으로 무장한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에 한글 성경이 먼저 번역된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가 아닐 수 없다. 

먼저 중국 만주에서는 영국 선교사 존 로스가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지원을 받고, 조선인 서상륜·이응찬·백홍준 등의 도움을 받아 1882년 최초 한글 성경인 ‘예수성교 누가복음 전서’를 발행한다. 이어서 1887년에는 우리말 신약전서인 ‘예수셩교젼서’를 합본해 간행했다. 이것이 한글로 간행된 최초의 성경이었다.

 1887년 최초의 우리말 신약전서인 ‘예수셩교젼서’ 표지와 본문. /대한성서공회
1887년 최초의 우리말 신약전서인 ‘예수셩교젼서’ 표지와 본문. /대한성서공회

일본에서는 유학생 이수정이 미국 성서공회 일본지부 총무인 헨리 루미스 목사의 권유로 먼저 한문 성경에 이두로 토를 단 4복음서와 사도행전을 1884년에 발간한다. 이를 바탕으로 1885년엔 최초의 국한문 성경인 ‘신약마가젼복음셔언해’를 출간했다. 바로 이 책이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일본을 경유해 조선으로 들어올 때 가지고 온 성경이다. 

그 후, 많은 우여곡절을 거쳐 1892년에 완성된 ‘마태복음젼’을 시작으로 1900년 5월에 신약성경 전부가 완역되었다. 이것이 국내에서 번역된 최초의 신약전서인 ‘신약젼셔’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국내에서 한글 성경이 번역되는 과정에서 존 로스 번역본과 이수정 번역본이 중요한 모본이 되어 신약성경 번역에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언더우드가 성서 개역 작업을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한글에 대한 남다른 열정 때문이었다. 1885년 4월, 서울에 도착한 언더우드는 두 달 뒤인 6월부터 천주교인 송순용을 어학 서생으로 채용해 오로지 한국어 공부에 매진한다. 송순용은 당시 가장 탁월한 어학 선생이란 평판을 얻을 만큼 명망있는 사람이었다. 

언더우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전도도 할 겸 지방으로 가서 현지인들과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조선 민초들의 삶 속에 녹아 있는 살아있는 입말을 익혔다. 언더우드는 1887년부터 1889년까지 매년 3차가 걸친 지방으로 전도여행을 시작했는데, 여기에는 현지인들의 입말을 배우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심지어 1889년 3월, 릴리아스 호턴과 결혼한 직후에도 신혼여행을 겸한 제3차 전도여행으로 의주에 가서 33명에게 세례를 베풀기도 했다. 

1889년 한국에서 결혼한 언더우드 선교사 부부는 신혼여행을 겸한 서북지방 일대의 답사에 나섰다. 사진은 선교여행을 떠나는 언더우드 선교사 부부(왼쪽 세번째와 다섯번째)와 짐꾼들.
1889년 한국에서 결혼한 언더우드 선교사 부부는 신혼여행을 겸한 서북지방 일대의 답사에 나섰다. 사진은 선교여행을 떠나는 언더우드 선교사 부부(왼쪽 세번째와 다섯번째)와 짐꾼들.

◇“한글도 글이라는 생각을 조선인에게 준 것은 실로 예수교회외다”

언더우드가 주로 신약성경 번역에 주력했다면, 윌리엄 데이비드 레이놀즈 선교사는 구약성경 번역을 도맡았다. 어학 실력이 출중했던 레이놀즈는 그의 어학 선생과 함께 강화도에 나가 한국말로 전도를 다녔다. 레이놀즈는 한국어 공부를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20분 정도의 한국어 설교가 가능할 정도로 어학에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영국성서공회 조선지부장 휴 밀러는 그에 대해 “최고의 한국어 실력 소유자”라고 평할 정도였다. 

레이놀즈는 전주 서문교회의 담임목사로 섬기면서 1904년 10월부터 두 명의 조선인 조수와 함께 구약성경 번역에 몰두했다. 드디어 1910년 4월 2일 오후 5시, 레이놀즈는 구약의 마지막 구절 번역을 마치자마자 서울에 있던 영국 성서공회의 대리인인 휴 밀러에게 한국말로 “Punyuk ta toiesso(번역 다 됐소)”라는 전문을 보냈다. 구약성경 39권 중 예레미야서를 제외한 38권을 5년 5개월만에 마친 것이었다. 구약과 신약을 합쳐 총 66권의 한국어 성경 가운데, 신약의 고린도전·후서 두 권을 포함해서 40권이 그의 손으로 번역된 것이다. 

한글 구약성경 번역에 있어 또 한 명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알렉산더 피터스다. 그는 1871년 러시아의 정통파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히브리어를 배웠다. 하지만 제정 러시아 말기의 혼돈 속에서 러시아를 떠나기로 결심한 그는, 난관 끝에 일본 나가사키에 상륙한다. 나가사키에서 다시 미국으로 갈 계획이었던 그는 그곳에서 선교사들을 통해 복음을 접하고 세례를 받은 후, 자신이 한 번도 생각지 않았던 조선으로 인도함을 받았다.

당시 조선은 구약성경 번역을 절실히 필요로 하던 상황이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조선에 구약성경을 선사하기 위해 그를 러시아에서 불러내신 건지도 모른다. 1895년 조선에 와서 3년간 한글을 익힌 그는 1898년 시편 중 일부를 우리말로 번역을 했는데, 그것이 최초의 한글 구약성경인 ‘시편촬요’다. 피터스 목사는 구약성경 개역위원회의 평생위원으로 위촉돼 한글 성경 작업에 주도적 역할을 감당한다. 개역 작업은 1938년에 끝이 났고, 그 해에 ‘개역성경전서’가 출판됐다. 

구약성경 최초의 한국어 번역자 알렉산더 피터스 목사와 그가 한국어를 배운 뒤 3년만에 번역한 시편촬요(1898). 맨 오른쪽은 시편촬요에 수록된 시편 23편 내용이다. /피터스 목사 기념사업회
구약성경 최초의 한국어 번역자 알렉산더 피터스 목사와 그가 한국어를 배운 뒤 3년만에 번역한 시편촬요(1898). 맨 오른쪽은 시편촬요에 수록된 시편 23편 내용이다. /피터스 목사 기념사업회

한편,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 이광수는 1917년 7월, 잡지 ‘청춘’ 9월 호에 게재한 ‘야소교의 조선에 준 은혜’ 제하의 글에서 성경의 한글 번역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한글도 글이라는 생각을 조선인에게 준 것은 실로 예수교회외다. 귀중한 신구약과 찬송가가 한글로 번역되어, 이에 비로소 한글의 권위가 생기고 또 보급된 것이요. 석일(昔日)에 중국경전의 언해(諺解)가 있었으나 그것은 보급도 아니 되었을뿐더러 번역이라 하지 못하리만큼 졸렬하였소. 소위 토를 달았을 뿐이었소. 그러나 성경의 번역은 물론 아직 불완전하지마는 순 조선말이라 할 수 있소. 아마 조선 글과 조선말이 진정한 의미로 고상한 사상을 담는 그릇이 됨은 성경의 번역이 최초일 것이요. 만일 후일에 조선 문학이 건설된다 하면 그 문학사(文學史)의 제 일항에는 신구약의 번역이 기록될 것이외다.”

◇“그렇게 짧은 기간에 기독교 사상·용어 쉽게 전할 수 있었던 언어는 없었을 것”

한글 확산과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사람은 제임스 게일(1863~1937) 선교사다. 그는 1888년 토론토 대학교를 졸업한 후, YMCA 파송 선교사로 조선 땅을 밟는다.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그는 남다른 언어 구사력을 가진 선교사였다. 그는 성서 번역 외에도 한영사전을 만들고, 영어로 한국사와 한국문학을 번역해 세계에 소개할 수 있었던 데는 그의 이러한 문학적인 재능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조선을 복음화하기 위해 파송 받은 선교사였지만, 그렇다고 조선을 서구화하는데 치중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소중하게 여기면서 그런 토양에 어울리는 조선의 기독교가 꽃 피기를 염원했다. ‘춘향전’, ‘구운몽’, ‘심청전’ 같은 한국민족 고유의 정서를 담은 소설을 영어로 번역해 서구에 소개한 이도 바로 게일 선교사다. 

게일 선교사는 기독교 고전인 ‘천로역정’을 한글로 번역하기도 했는데, 천로역정에 삽화로 넣은 등장인물들을 모두 한복에다 갓을 쓴 조선 사람들로 묘사했다. 그리고 여기에 등장하는 ㅊ펀사는 마치 우리 민족 고유의 선녀를 닮았다. 이런 이유로 천로역정은 당시 조선 사회에 빠르게 퍼져 나갔다. 우리나라 최초의 장로교 목사 7인 중 한 명이었던 길선주 목사는 천로역정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은 후 강력한 성령 체험을 하여 기독교인이 됐다고 전해진다. 

제임스 게일 선교사와 그가 한글로 번역한 천로역정.
제임스 게일 선교사와 그가 한글로 번역한 천로역정.

게일은 1892년에 한글로 ‘사도행전’을 번역해 출판하는 등 신약성경 번역에도 깊게 관여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의 ‘한영사전’을 편찬했다. 이 사전은 현대 사전이 간행되기 전까지 거의 50년 동안 유일한 한영사전이었다. 

게일은 선교사끼리만 어울려 지내는 것을 못마땅해 했다. 선교사는 당연히 현지인들과 어울리며 그들 속에서 지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가 서울 연동교회 담임목사로 있을 때 사랑방에서 매일 7시간 동안 사람들과 어울리며 조선 음식을 먹고 조선 문화를 익혔다고 한다. 무엇보다 게일은 한글 보급에 힘썼다. 그만큼 한글을 자랑스러워하고 사랑했기 때문이다. 게일은 1909년에 출판한 자신의 저서 ‘전환기의 조선’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한글은 정말로 이 세계에서 제일 간단하다. 서기 1445년에 발명되어 조용히 먼지투성이에 묻혀 자기의 세월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누가 그것을 알아주었겠는가? 그것이 너무 쉬웠기 때문에 결코 쓰여 지지도 않고 멸시만 당했다. 여자들조차도 한글을 한 달 조금 넘는 기간에 배울 수 있었으니, 그렇게 값싼 글자를 무엇에다 쓸 것인가?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에 의해 그것은 신약성서와 다른 기독교 서적을 위해 준비된 채 자기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날까지 이들은 이 신비롭도록 단순한 언어를 거의 배타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아마 이것은 모든 것 중에서 놀라운 섭리일 것이다. 이 언어는 시간이 시계를 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리스도의 모든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고 있음을 말해 준다.”

그리고 이듬해인 1910년 영국 에든버러에서 열린 세계선교사 대회에서 게일은 한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아마 한국어 이외의 어떤 언어도 그렇게 짧은 기간에 기독교적 사상과 용어를 쉽게 옮겨 전할 수 있었던 언어는 없었을 것이다.”

◇한글 재발견·보급은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 빨리 전하기 위한 ’고속도로‘ 역할

최초의 한글 신약 전서인 ‘예수셩교젼서’ 각권들.
최초의 한글 신약 전서인 ‘예수셩교젼서’ 각권들.

이처럼 선교사들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한글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성경과 기독교 관련 서적, 신문 등을 발행함으로써, 기독교 복음은 짧은 기간에 전국 방방곡곡으로 빠르게 퍼져 나간 갔다. 그 결과 선교사들이 한글의 도움을 받아 빠르게 복음을 전했던 만큼 한글 또한 선교사들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 ’너무 쉽다‘는 이유로 조선의 양반 지식인층으로부터 400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천대와 괄시를 받아왔던 한글은, 한글이 가진 본연의 가치에 눈을 뜬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마침내 조선 후기에 광명을 찾게 됐다.

한글의 재발견과 보급은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빨리 전파하기 위한 ’고속도로‘와 같은 역할을 했다. 그러나 한글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또 한 번의 큰 시련에 맞닥뜨린다. 바로 ’한글 사용 금지‘, ’한글 이름 금지‘라는 일제의 조선 말살정책이었다. 선교사들의 열정과 조선 민초들의 복음에 대한 갈급함으로 인해 폭발적으로 확산되던 한글이 사자질 운명에 처한 것이다. 

일제는 1936년 조선 사상범 보호관찰령, 1941년 조선 사상범 예방 구금령을 일방적으로 공포하고 민족적인 단체들에 대해 ’사상‘과 ’안전‘이라는 이름으로 대대적인 단속에 나선다. 우리말과 우리글을 지키기 위한 조선어학회 회원들을 1942년 10월 1일부터 일제히 검거한 조선어학회 사건이 발생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조선어학회 사건은 이중화, 장지영, 최현배, 이극로 등 핵심 인물 11명을 고문 끝에 취조해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했다는 거짓 자백을 받아내 내란죄로 기소하고 사법 처리한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어학회는 강제 해산당한다. 해방 후 1949년 9월에서야 지금의 한글학회로 새로 태어나게 된다. 만약 일제가 패망하지 않았다면 한글은 또다시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을지 모른다. 

조선어학회 회원들. /나무위키
조선어학회 회원들. /나무위키

일제는 민족말살정책을 철저히 감행했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자에게는 학교 입학도 금지시키고 취직의 길도 막아버렸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도 한글 사용은 금지됐다. 교회도 설교는 일본어로 해야 했다. 그럼에도 조선 기독교인들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한글 성경과 찬송으로 예배를 드렸다.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저서 ’한국기독교 문화운동사‘에서 “해방 직전까지 한글을 ’공공 용어(대중어)‘로 사용한 곳은 교회 뿐이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한글을 지킨다는 것은 신앙을 지키는 것이자 곧 조선 민족과 자신을 지키는 일이기도 했다. 그렇게 조선 기독교인들은 한글 성경을 생명처럼 여겼다. 게일 선교사는 ’전환기의 조선‘에서 그걸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조선에서는 흔히 신약성서가 여인이 허리끈에 매여 있다. 유쾌한 여행길에 있는 등산가의 짐 꾸러미 속에, 작은 마을에 있는 가정의 벽장에, 그리고 거실의 선반에 쌓여 있는 것은 예수를 말하고 구원해 줄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언문으로 씌어진 책들이다. 나는 나 자신이 그 번역에 참여했던 것을 가장 선택된 은총으로 생각한다.”

선교사가 아닌 한국인 중에서 ’한글운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은 감리교인 주시경 선생이다. 주시경 선생은 1908년에 국어연구학회(한글학회의 전신)을 설립했는데, 이 학회의 주요 인사들도 대부분 기독교인 학자들이었다. 그의 제자이자 한글학회의 핵심 멤버였던 최현배는 평소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의 거룩한 뜻이 기독교에서 실현된 것”이라고 말했다. 즉,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근본 취지, 거룩한 뜻인 민중 교화가 기독교 유입과 선교를 통해 비로소 성취됐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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