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하와이 초창기 5년(1913~1918)
1905년 샌프란시스코 공립협회
1907년 하와이 한인합성협회
1909 년 국민회·1910년 대한인국민회
1913년 9월 '태평양잡지' 창간
1913년 9월 한인중앙학교 교장 취임
1918년 12월 독립 한인기독교회 창설
1913년 4월 『한국교회핍박』 출판을 마무리한 38살 이승만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하와이 한인사회를 이끌어 갈 여러 가지 방도를 모색했다. 그에 필요한 기초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이승만은 1913년 5월부터 7월까지 약 두 달간 하와이 군도의 마우이 (Maui) 섬 및 카우아이 (Kauai) 섬을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장 박상하 및 총무 안현경과 함께 둘러보며 한인 이민자들의 생활실태 파악에 나섰다.
하와이에는 이미 이승만 정착 3년 전인 1910년 2월부터 동포들의 ‘교육과 실업을 장려하여 민족의 실력을 배양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가 조직되어 있었다. ‘대한인국민회’는 잃어버린 조국을 대신하는 조직체였다. 사진 교환으로 결혼해 하와이로 이민 온 한 신부의 말을 빌리면 ‘대한인국민회’는 “이민해 들어온 우리 백성의 기관조직”이었다 (이덕희, 2015, 『이승만의 하와이 30년』 북앤피플, 38쪽).
이 대목에서 당시 한인들이 이주한 미주 각지의 한인 단체 현황과 동향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주한 한인들이 가장 많은 곳은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였다. 하와이는 대규모 노동이민을 배경으로 여러 종류의 소규모 한인 단체가 우후죽순으로 난립하다가 1907년 2월 ‘한인합성협회’(韓人合成協會)가 출범하면서 상당한 수준의 통합을 이루었다. 한인합성협회는 창립과 함께 기관지 ‘한인합성신보’도 발행했다.
샌프란시스코는 하와이 한인 이민자들이 미주 본토로 재이주하는 길목이었다. 여기에는 안창호가 중심이 된 ‘공립협회’(共立協會)가 1905년 9월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창립과 함께 ‘공립신보’라는 기관지도 발행했다. 이외에도 샌프란시스코에는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가 ‘대동공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며 활동했다. 또한, 멕시코로 이민 간 한인들도 초보적인 수준의 교민단체를 만들고 있었다.
1908년 3월 장인환·전명운 두 사람의 ‘스티븐슨 저격사건’은 난립하던 미주 한인단체들을 통합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샌프란시스코 ‘공립협회’와 하와이 ‘한인합성협회’가 하나로 뭉쳐 1909년 2월 ‘국민회’(國民會)를 탄생시켰다. 통합을 계기로 ‘공립신보’는 ‘신한민보’라는 새 이름을 달았고, ‘한인합성신보’는 ‘신한국보’라는 새 이름을 달았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910년 2월 ‘국민회’는 다시 샌프란시스코의 ‘대동보국회’와 결합해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로 이름을 바꾸며 확대 개편되었다. ‘대동공보’ 역시 ‘신한민보’에 통합되었다. 대한인국민회는 산하 지역조직으로 ‘하와이지방총회’와 ‘북미지방총회’를 각각 두었다. 북미지방총회 산하에는 ‘멕시코지방회’도 두었다. 이어서 ‘시베리아지방총회’ 및 ‘만주지방총회’가 ‘대한인국민회’ 산하로 들어왔다. 1911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구성되면서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던 한인 단체들은 마침내 하나의 조직으로 통합되었다. 1910년 일제의 한반도 병합은 해외의 교민들을 통합시키는 뜻밖의 효과를 가져왔다.
이승만이 이주한 1913년 하와이는 ‘대한인국민회’ 산하의 ‘하와이지방총회’가 교민들 입장을 대변하던 시기였고, 사진신부는 이를 두고 ‘이민해 들어온 우리 백성의 기관조직’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교민단체 대표와 함께 하와이 이민자들의 생활을 구석구석 살핀 이승만은 언론 및 출판, 교육, 그리고 교회를 중심으로 교민들의 생활에 파고드는 구체적인 활동에 착수했다.
우선, 이승만은 1913년 9월 순 국문 월간으로 발행하는 『태평양잡지』 (The Korean Pacific Magazine) 를 창간했다. 당시 하와이 한인사회의 언론과 출판은 두 가지 매체가 담당하고 있었다. 하나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가 발행하는 기관지 ‘신한국보’이고, 다른 하나는 하와이 감리교회가 발행하는 ‘포와한인교보’였다 (포와는 하와이의 한자어 布哇).
1913년 여름 ‘포와한인교보’가 폐간된다는 소식을 접한 이승만은 ‘태평양잡지’를 창간해 ‘포와한인교보’의 역할을 이어가며 자신의 생각을 펼치는 매체로 삼았다. ‘신한국보’ 주필로 이승만보다 두 달 먼저 하와이에 들어와 ‘무장투쟁’을 설파하던 박용만은 1913년 9월부터 신문의 제호를 ‘국민보’로 바꾸고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었다.
박용만과의 관계가 여전히 협조적이긴 했지만, 이승만은 자신의 지론인 ‘실력양성’을 교민들에게 펼칠 지면이 필요했다. 20대의 언론인 경험이 물론 도움이 되었다. 이승만은 한 달에 100쪽 안팎 분량의 잡지 기사를 거의 혼자 매번 썼다. 200자 원고지 350∼400장 분량이었다 (손세일, 2015, 『이승만과 김구』 제2권, 조선뉴스프레스, p. 504).
불행히도 ‘태평양잡지’는 현재 전체 실물이 남아 있지 않다. 실물이 있는 것은 1913년 11월호, 1914년 1월호부터 4월호 그리고 6월호, 1923년 3월호가 전부다. ‘태평양잡지’는 중간에 가끔 결호가 있기는 했으나, 기본적으로 매달 발행되다가 1930년 12월 13일 자로 20쪽 안팎의 주간지 ‘태평양주보’로 바뀌었으며 1970년 2월 8일 폐간될 때까지 명맥을 이었다.
다른 한편, 이승만을 하와이로 초청한 하와이 감리교회 감리사 와드맨 (John Wadman) 은 1906년부터 감리교회가 운영해 온 ‘한인남학생기숙학교’ (Korean Boarding School for Boys) 교장으로 이승만을 1913년 9월 임명했다. 이승만은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학교 이름을 ‘한인중앙학교’ (Korean Central School) 로 바꾸고 학교의 체제도 여학생들이 다닐 수 있는 ‘남녀공학’으로 개편했다. 1년 후 1914년엔 여학생들을 위한 기숙사도 마련했다.
그러나 학교를 후원해 온 감리교 여선교회는 ‘여학생을 가르치지 않는 조건’을 그제서야 내세우기 시작했다. 애초에 학교 이름을 ‘남학생’ 기숙학교라고 이름 붙인 바로 그 이유였다 (이덕희, 2015, 『이승만의 하와이 30년』 북앤피플, p. 82). 와드맨 후임으로 온 프라이 (William H. Fry) 감리사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국, 이승만은 1915년 6월 한인중앙학교 교장 자리를 물러났다.
열받은 이승만은 바로 이어 1915년 10월 교민들이 모아 준 기금을 활용해 외부의 지원에 의지하지 않는 독립학교 ‘한인여학원’ (Korean Girls’ Seminary) 세우고 교장에 취임했다.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1918년 1월이 되면서 ‘한인중앙학교’ 남학생들도 대거 전학을 와서 학교체제는 남여공학으로 개편됐다. 1918년 9월에는 학교 이름을 ‘한인기독학원’ (Korean Christian Institute) 으로 바꾸었다. 엄청난 성공이었다.
하와이에 정착해 한인 감리교회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하와이 감리교 선교부의 정신적·물질적 지원을 받아 온 이승만은 학교 때문에 감리교회와 갈등을 겪자 독립적인 교회를 세우는 일에도 뛰어들었다. 1918년 11월 호놀룰루 제일한인감리교회가 이승만을 제적시키자, 이승만을 따르던 회중은 한 달 반만인 12월 23일 한인기독교회 (Korean Christian Church) 라는 독립교회를 창건했다.
미국 감리교 선교부의 지침을 따르기만 하는 교인들 모습을 보며 ‘주인의식이 있어야 교회도 부흥할 수 있다’고 설파한 이승만의 승리였다. 1913년 『한국교회핍박』에서 한국 교회도 독립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38살 이승만은, 5년만인 43살이 되면서 하와이에서 한국 교회도 독립할 수 있음을 실제로 보여주었다 (이덕희, 2015, 『이승만의 하와이 30년』 p. 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