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남공작사】빨치산 괴멸을 초래한 북한의 공작
【대남공작사】빨치산 괴멸을 초래한 북한의 공작
  • 유진
  • 승인 2018.08.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하당조직을 재건하려고 했던 북한의 대남공작 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현상. 남부군 사령관 요즘도 지리산 일대에서는 그의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제4지구당 지도부와 접선한 정도완 지도연락공작조는 중앙당 연락부에서 지시받은 대로 이현상ㆍ방준표ㆍ박영발ㆍ조명하 등 지구당 및 유격대 지도부 간부들에게 중앙당의 결정을 전달하고 자신들이 부여받은 공작임무를 설명했다. 

그리고 지도연락공작조의 지시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중앙당 연락부의 결정을 전달하고 그대로 따를 것을 강조했다. 이에 대해 제4지구당 지도부 간부들은 정도완 지도연락공작조에 전권을 위임하고 이들의 지시에 따르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1953년 8월 말부터 10일 동안 지리산 밑 점골에서는 지도연락공작조 책임자 정도완의 지도하에 제4지구당 조직위원회가 열리고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5차 전원회의 결정 관철을 위한 문헌토의가 진행되었다. 구체적으로는 '반당 반국가 파괴 암해 종파분자들인 박헌영ㆍ이승엽 도당의 여독과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대책'을 토의한다는 명분하에 제4지구당 및 유격대 지도부에 대한 숙청작업이 진행된 것이다.

전라북도 당위원장 겸 제4지구당 부위원장이던 방순표의 기본보고에 이어 전라남도 당위원장 겸 지구당 부위원장인 박영발, 전라북도 당부위원장 겸 지구당 조직부장인 조명하가 토론했다. 또한 박찬규ㆍ김선부ㆍ박갑출ㆍ김정기 등 많은 지구당 간부들과 유격대 간부들이 토론에 참가했다. 이들은 모두 지구당 사업과 유격대 활동에서 박헌영ㆍ이승엽 등 남로당 수뇌부의 여독과 잔재를 비판하고 이를 청산할 것을 다짐했다.

밀월관계였던 한때 김일성(왼쪽)과 박헌영(오른쪽)

◇빨치산 지도부, 박헌영 잔재라며 남김 없이 숙청

특히 이 회의에서는 이승엽으로부터 제4지구당위원장 겸 유격대사령관으로 임명받아 지리산으로 파견되었던 이현상과 중앙당 전권대표로 파견되어 제4지구당을 지도했던 여운철 등을 박헌영ㆍ이승엽 등 구 남로당 수뇌부의 충실한 심복으로 규정해 비판하고 이들을 처벌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이현상은 엄중경고 책벌과 함께 지구당위원장과 유격대대장에서 해임해 평당원으로 강등시키고 여운철은 출당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또한 지구당조직위원회와 잔존하는 유격대 김지희 부대를 해체하기로 결정했다.

이와 함께 지구당 및 유격대 간부들과 대원들은 사상검토를 거쳐 재평가, 재등록한 다음 출신지역과 공작여건, 건강문제 등을 고려하여 경상남도당과 전라남도당, 전라북도당 산하 조직에 배속시켰다. 그리고 모든 당원 및 유격대원들은 자신이 소속된 당조직의 지도를 받으면서 출신지역 등에 내려가 당조직 재건공작을 벌일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회의에서 토의 결정된 내용 가운데 조직을 해체하고 간부들을 해임하는 등 내부적인 조직문제는 집행이 되었으나 나머지 후속조치들은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중앙당의 지시대로 지구당 및 유격대를 해체하여 경남도와 전남도, 전북도당에 배속시키고 해당 당조직의 지시 하에 출신 및 연고지역으로 내려가 당조직 재건 활동을 벌이도록 하였으나 거의 시작도 해보지 못하고 대부분의 인원이 전멸된 것이다.

6·25 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10일 충남 연기군 전의에서 미군에 붙잡힌 빨치산. 인민군의 남하에 호응, 교란작전을 벌이다 체포된 것으로 보인다. 출처=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
6·25 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10일 충남 연기군 전의에서 미군에 붙잡힌 빨치산. 인민군의 남하에 호응, 교란작전을 벌이다 체포된 것으로 보인다. 출처=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

◇중앙당 결정, 빨치산 지휘부 숙청만, 후속 조치 실행 못해

우선 중앙당 연락부로부터 이현상의 제4지구당에 대한 지도연락 임무를 부여받고 파견되었던 정도완 공작조가 임무를 수행한 후 북한으로 복귀하지 못하고 거의 전멸되다시피 한 것이다

원래 정도완 공작조는 임무를 기본적으로 수행한 다음 지리산지구에서 빠져나가 소백산줄기와 태백산줄기 등 기존에 침투할 때 사용했던 산악루트를 따라 북한지역으로 복귀하려 하였다. 그러나 1953년 가을에 접어들면서 군경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이 전개되는 바람에 미처 지리산지구도 빠져나가지 못하고 지구당 주요간부들의 비트를 전전하면서 토벌을 피해 다니다가 조장 정도완 등 3명이 사살되고 말았다.

간신히 살아남은 2명 역시 지구당을 해체할 때 노출 및 건강상 문제로 월북하기로 결정된 10여명의 인원을 데리고 피신해 다니다가 사생결단으로 지리산지구를 빠져나왔으나 소백산과 태백산맥을 타고 북상하는 과정에 토벌대와 조우하여 대부분 사살당하고 3명만 겨우 살아남아 1954년 8월 말에 휴전선을 넘어 복귀하는데 성공했다.

이와 함께 지구당 및 유격대 간부를 역임했던 인물들도 대부분 사살되거나 체포되었다.

지구당위원장 겸 지리산유격대장으로 활동하다 평당원으로 강등된 이현상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회의가 끝나고 1주일 후인 1953년 9월 17일 지리산 빚장골에 머물다 사살되었다. 방순표는 1954년 1월 초 덕유산의 비트 앞에서 머뭇거리다 사살되었다.

전쟁 전 북한지역의 함경북도당 조직부장을 역임하다 제4지구당 해체 후 경남도당 위원장에 임명된 조병하는 지리산 비트에 은신해 있다가 1954년 2월 초에 토벌대에 의해 생포된 후 사형에 처해졌다. 전남도 유격대장 김선우는 덕유산 비트에 숨어있다 1954년 2월 말 군경 토벌대에 포위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렇게 지구당 및 유격대 주요간부들이 1954년에 접어들어 토벌대의 소탕작전에 의해 제대로 된 반격도 해보지 못하고 전부 사살되었다. 유일하게 잔존해있던 김지희 부대도 토벌대에 의해 전멸됨으로써 지리산지구의 지구당 및 유격대는 흔적마저 없어졌다.

물론 일부 간부들이 중앙당 연락부의 방침 및 지구당 조직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도시와 농촌으로 내려가 지하당조직 재건을 위한 공작을 벌이다가 체포된 경우도 있었다.

경남도당 간부들인 김병인ㆍ김상홍ㆍ박찬규 등은 부산으로 잠입해 지하당조직을 재건하기 위한 공작을 펼치다가 박찬규는 1954년 봄에 체포 처형되었다. 김삼홍은 1954년 여름에 체포 사살되었다. 김병인은 1954년 12월에 부산에서 체포되었다. 전남도당 재건공작을 위해 광주에 잠입했던 박갑출은 1955년 6월에 체포되었고 전북도당을 재건하기 위해 전주에 잠입해 활동하던 김정기는 1957년 10월에 체포되었다.

◇지리산 빨치산 전멸 이유는 북 대남공작부서 오류 때문

이렇게 볼 때 지리산지구에 잔존해있던 지구당 및 유격대가 전멸하다시피 한 것은 당시 북한 대남공작부서의 전략과 전술이 결정적으로 오류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노동당 연락부는 속리산지구에 제3지구당 지도부 및 당원들이 생존해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1953년 7월 말에 박영학을 조장으로 하여 5명으로 구성된 지도연락공작조를 침투시켰다. 그러나 이들은 1개월 동안 속리산지구 산악지대를 헤매다가 허탕치고 복귀했다.

또한 연락부에서는 경북의 제5지구당 일부 잔존 세력을 수습하기 위해 1953년 7월 중순 조장 김일기 등 지도연락공작조를 파견하였으나 이들 역시 침투 후 1개월 동안 소백산지구와 경북북부 산악지역을 헤매다가 그냥 돌아오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지리산지구를 비롯한 남한 산악지역의 지구당조직 및 유격대를 찾아내 연계연락을 실현하고 재수습한 다음 이들을 출신지역 등에 내려 보내 지하당조직을 재건하려고 했던 북한의 대남공작 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yj@jayoo.co.kr

더 자유일보 일시 후원

“이 기사가 마음에 들면 후원해주세요”

  • ※ 자유결제는 최대 49만원까지 가능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