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잘라 맹세하노니,,,『건국 70주년 2만리 역사기행』②
손가락 잘라 맹세하노니,,,『건국 70주년 2만리 역사기행』②
  • 조희문 평론가
  • 승인 2018.08.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안중근의사의 단지동맹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크라스키노 지역에 위치한 안중근 의사의 단지동맹(斷指同盟) 기념비를 찾은 것은 여정 첫날인 6월 24일 오전 10시 쯤, 해는 벌써 중천이다. 인천공항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새벽 2시 밤 비행기를 타고 2시간여를 날아 여명이 밝아오는 5시 무렵에 닿았다. 첫날 숙소로 정한 교회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고 다시 버스는 내리 3시간을 달려 크라스키노 목적지에 일행을 내려놓았다.

◇ 추카노프카 마을 강변초라하게 서있던 기념비는 강물이 자주 범람하면서 

기념비 주변은 단출했다. 주비(主碑)가 서 있는 곳에서 대여섯 발자국 거리를 두고 작은 비석이 한 방향을 이룬다. 그 사이를 연도 표시를 한 바닥 돌이 징검다리처럼 메우고 있다. 기념비를 세운 해로부터 1909년 3월, 단지회를 결성한 때로 시간을 거스르는데, 현재와 과거를 잇는 의미를 두었다고 한다. 큰 비석은 가로, 세로 각 1m에 높이가 4m 정도이고, 작은 비석은 가로 세로 높이가 모두 1m 크기의 검은 돌이다.

비석의 다른 한편에는 15개의 받침돌이 놓여 있다. 단지동맹 회원(안중근 의사를 포함하여 12인)을 기리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다가도 개수가 열다섯이라는 사실을 짚으면 그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이건 뭐지 라며 일행끼리 두런두런 하는데, 슬며시 설명을 거드는 분이 나타났다. 유니베라 러시아 법인장 정민석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남양알로에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진 유니베라는 미국, 멕시코, 러시아, 중국 등지에 알로에 농장 법인을 설립했는데, 러시아 법인은 2001년에 세웠다.

안중근의사 단지동맹비 건립과 유니베라의 인연은 각별하다. 현재 기념비가 서 있는 곳이 유니베라 농장의 일부이고, 기념비가 이 곳에 자리 잡는 과정에서도 상당한 협조와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단지동맹 기념비는 원래 2001년 10월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이 설립을 추진한 결과로 러시아 크라스키노(延秋) 추카노프카 마을 강변에 세워졌었다. 하지만 부근 강물이 범람하면서 기념비가 자주 물에 잠기고 훼손이 심각해지자, 2006년 원래 위치에서 1km 떨어진 유니베라 회사 농장 앞 공터로 옮겼다.

새로 옮긴 곳은 수해를 받지 않는 곳이었지만 이 지역이 러시아와 중국의 국경지역으로 편입되는 바람에 통행이 제한되었고, 결국 다시 기념비를 다른 곳으로 옮겨 세우는 작업이 추진되었다. 이전 계획이 추진된 지 5년만인 2011년 8월 4일에 기념비 제막식을 가지게 된 것인데, 지금 보게 된 기념비가 세 번째 옮겨 세운 바로 그 비다.

안중근의사의 단지동맹비
안중근의사의 단지동맹비

정 법인장은 처음 안중근 의사 단지동맹비가 세워지는 과정에서부터 이전을 거듭하는 과정까지 직, 간접으로 간여한 결과 남다른 설명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안중근 기념비 뿐만 아니라 러시아 거주 한인(고려인)들이 1937년,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당하는 과정, 블라디보스크를 비롯한 연해주 일대의 한인 독립운동 과정, 인근에 산재한 발해유적 등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는 덕분에 이 양반이 이곳에서 사업을 하는 대신 역사 공부를 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기념비 옆의 의자석 15개는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편하게 앉아 옛 독립 영웅들의 행적을 짚어보라고 여유 있게 만든 것이라고 한다. 우리 일행으로서는 뜻하지 않은 전문 가이드를 만난 셈이었는데, 덕분에 인근 지역의 답사에서도 풍성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손가락을 잘라 대한독립의 맹세를 한 단지동맹(斷指同盟)은 안중근의사와 항일의 뜻을 같이 하는 11명이 1909년 3월초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하고 왼손 넷째 손가락(무명지) 첫 마디를 잘라, '大韓獨立(대한독립)'이라 피로 쓰며,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다짐한 일을 가리킨다. 그 맹세 후 6개월 정도가 지난 10월 26일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폭탄 같은 파문을 일으켰다.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여순의 일본 감옥에 수감된 안의사는 다음 해인 1910년 3월 26일 순국했다. 안의사는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자신 외에 단지동맹 가담자가 11명이 더 있다는 말로 항일구국에 몸바칠 용사들이 줄지어 있음을 밝혔다. 다만 신분이 드러나지 않도록 끝까지 동지들의 이름을 공개하지는 않아 11명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에 대하여 밝혀진 바가 없다.

기념비 안내문에는 김기룡, 강순기, 정원주, 박봉석, 류치홍, 조응순, 황병길, 백규삼, 김백춘, 김천화, 강창두 등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다. 누가 어떤 과정을 거쳐 밝힌 이름인지에 대해서도 경과가 없다.

◇ 그가 여순 감옥에서, 미완으로 남긴 ‘동양평화론’이란 원고를 보면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

우리는 흔히 안중근 의사를 일본을 저주하며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가 여순 감옥에서, 미완으로 남긴 ‘동양평화론’이란 원고를 보면 한중일 3국이 협력하여 동양평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일본과의 우호적 협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펼치고 있는 이 주장은 일본 군국주의가 아시아 평화를 위협하고, 더 나아가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존재가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동양평화를 위협하는 군국주의 일본의 행태에 분노하고, 그 같은 일본을 상징하는 표상으로서 이토를 저격한 안의사가 감옥에서 사형을 기다리는 최후의 순간에 내놓은 생각의 일단에서, 일본을 저주하는 대신, 동양평화를 이루어야 할 책임이 있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안의사가 실천하는 독립투사 영웅을 넘어 대한민국의 독립과 일본을 포함한 이웃 나라들과의 공존 번영을 구상한 위대한 평화주의자였음을 밝히는 선언문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안의사의 기대나 바람과는 달리 그 후 일제는 제국주의 침략을 멈추지 않았고 결국 제2차세계대전의 한 축이 되고 말았다.

돌아오는 길에 옛날 학교 옆 나무 그늘에서 가진 점심은 빵과 우유만으로 꾸민 테이블이었지만, 모두가 넉넉하게 즐겼다. 매점에서 파는 우유는 유니베라 농장에서 생산한 제품을 공급받는 것이라 하는데, 신선하기도 했지만 걸죽하면서도 살짝 신맛을 씌운 듯한 고소한 식감이 묵직하게 입맛을 자극한다.

노변 카페에 설치된 테이블은, 주변에 마땅하게 쉴만한 장소가 없는 것을 눈여겨 본 뒤 사회공헌 차원에서 최근에 만든 것이라고 한다. 미네, 모네. 세잔 같은 화가들이 그린 ‘풀밭위의 점심식사’에 비길만한 러시아판 ‘그늘 속의 점심식사’는 투박하면서도 여유로웠다.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선조들은 끼니는 제대로 챙겨 드셨을까.

조희문은 누구인가?

조희문은 좌파일색인 한국 영화계에서 거의 유일한 우파 영화 평론가(영화학 박사)다.

경인일보 문화부장을 거쳐

상명대 영화전공 교수,

인하대 영극영화과 교수,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

한국영화학회 회장 등 평생을 영화 관련 평론과 학술사업에 종사했다.

최근에는 좌파와의 역사문화전쟁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rsfnews@nate.com

더 자유일보 일시 후원

“이 기사가 마음에 들면 후원해주세요”

  • ※ 자유결제는 최대 49만원까지 가능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