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즈돌리노에역의 피눈물『건국 70주년 2만리 역사기행』④
라즈돌리노에역의 피눈물『건국 70주년 2만리 역사기행』④
  • 조희문 영화평론가
  • 승인 2018.08.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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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 한인들 강제이주의 출발지

코리아글로브와 역사정립연구소는 건국 70년을 기념하기 위해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스보보드니, 이르쿠쿠츠크 등 연해주 일대와. 새로운 삶을 찾아 국경을 넘어간 수많은 동포 한인들이 강제로 이주 당했던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까지 망국과 유랑의 흔적을 따라 갔다.

둘째 날, 라즈돌리노예 강 모래 언덕 한켠에 세워진 보재 이상설(1870-1917) 선생의 유허비를 찾았다. 일본이 대한제국과 강제로 을사늑약(1905)을 체결한 것을 계기로 국권회복 회동에 나선 그는 고종황제의 밀서를 받아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헤이그회담, 1907.6.15.∼10.18)에 이준, 이위종과 함께 특사로 파견되었다.

그들의 임무는 세계 40여개 국 대표단 앞에서,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것에 대하여 이는 대한제국 정부의 뜻이 아니라 일본의 강압에 의한 강제조약이라는 사실을 각국 대표단 앞에서 밝히는 것이었다. 여러 나라 대표단을 접촉하며 지원을 요청하는 과정에서 이를 눈치 챈 일본, 일본과 동맹(영일동맹)을 맺은 영국 두 나라의 적극적인 방해, 그밖의 다른 나라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와는 상관없는 일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듯 무시로 일관하는 바람에 결국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특사 일행은 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뜻을 이루지 못했다.

‘만국평화화의’는 이름만 평화화회의였을 뿐 열강들의 이해조정을 위한 ‘이해 거래 회의’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호머 알버트 선교사의 주선 덕분으로 몇몇 모임에서 대한제국의 입장을 밝힐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관련 내용은 여러 언론에 보도되었다. 하지만 그 뿐, 대한제국을 옹호하거니 지원하려는 나라는 없었다. 오히려 이 일을 계기로 일본은 고종황제를 퇴위시키고 대신 순종을 대한제국의 새로운 황제로 옹립한다.

이상설 선생 추모비(저작권 조희문)

특사 일행 중 이준은 헤이그에서 병사(독살설, 분사설도 있다)했다. 이 사건을 심각하게 본 일본은 궐석 재판을 통해 이준을 제외한 두 특사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당초의 뜻을 이루지도 못하고 귀국할 수도 없게 된 두 사람은 미국으로 망명했다. 1909년에 항일독립운동을 계속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다.

이상설은 연해주에서 최재형과 권업회를 조직하고 권업신문을 창간하는 등 열성적인 활동을 계속했으나 1917년, 47세 되던 해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가 남겼다는 유언은 독립운동을 염원하는 비장함이 가득하다.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그것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니 혼인들 어찌 감히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 글을 모두 불태워 강물에 흘려 보내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

남은 동지들은 유언에 따라 그의 유해와 유품 일체를 화장 한 뒤 라즈돌리노에 강에 뿌렸다. 그의 무덤이 없는 이유다. 그나마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이 협력하여 2001년 10월, 러시아 정부의 협조를 받아 현재의 위치에 추모비를 세운 결과로 흔적이나마 기릴 수 있게 되었다. 추모비 주변은 조그만 비에도 쉽사리 진흙 뻘로 변하고 모기가 극성을 부린다는 말을 들었지만 우리 일행이 찾았을 때는 그나마 마른 땅을 밟을 수 있었고 모기떼도 어디로 갔는지 잠잠했다.

보재 어른의 유해를 말없이 녹이듯 받아들였던 라즈돌리노에 강물은 지금도 그때와 다름없이 무심하게 흐르고 있다. 하늘은 맑고 구름은 높았다.

일행은 마련해간 제물을 진설한 뒤 절하거나 기도했다. 추모 제단을 준비하는 중에 한국 관광객 일행이 그곳을 찾았다. 경상남도 남해군의 이장님들 이라고 했다. 20여명의 일행은 뜻밖에 보게 된 추모 행사가 신기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였던지 끼리끼리 수군거린다. 우리 일행 쪽에서 취지를 설명하고, 기왕 오셨으니 함께 참배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에 기꺼이 줄을 짓는다. 답사 도중 쉽게 만나기 어려운 풍경이 분위기를 더욱 경건하게 만들었다.

라즈돌리노에 역(저작권 조희문)

보재 유허비를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들른 라즈돌리노에 역은 우수리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 중간 쯤에 위치한 간이역. 하루에 4-5차례 정도 정차하는 수준이라고 한다, 철길 쪽 역사에는 시각을 가리키는 조그만 전광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곳이 사용 중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지만 사람의 기척은 보이지 않는다. 역사 출입문도 닫혀있다.

마침 우리가 그곳을 찾았을 때 170여 개가 넘는 차량을 이은 화물열차가 지났다. 170개는 일행 중 누군가가 도대체 화물열차 길이가 얼마인지 일삼아 헤아려보다 거기까지 꼽은 숫자일 뿐 실제는 그보다 더 길었다. 기차를 이용한 물류가 그만큼 많다는 뜻일 터이다.

연해주 한인의 강제 이주가 시작된 라즈돌리노에 역(저작권 조희문)

지금은 한가해 보이는 간이역이지만 연해주 일대에 거주하던 한인(고려인)들에게는 피눈물이 배어 있는 통한의 장소로 기억하는 곳이다. 1937년 9월, 연해주 일대의 17만 한인들이 강제 이주 당한 곳이기 때문이다. 9월 9일 첫 기차가 출발한 뒤를 이어 10월 중순까지 한달여 동안 계속 이주 열차가 중앙아시아를 향해 떠났다. 간단한 옷가지와 가재도구만을 들고 4가족 씩 화물열차 한 칸에 실린 한인 동포들은 보름이 넘는 시간을 달린 끝에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 같은 중앙아시아 지역에 강제로 옮겨졌다.

우리 일행의 마지막 방문지가 될 카자흐스탄 우슈토베는 3만2천여 명이 처음 몸을 내린 곳. 라즈돌리노에 역에서 8천여 ㎞이니. 옛날 거리로 짚으면 2만 리. 100리, 1000리도 멀다고 하는데 2만 리면 하늘도 땅도 물도 다른 곳이다. 어렵게 일군 터전을 버려둔 채 빈손이나 다름없는 처지로 화물열차에 실려 수만리 먼 길을 향하는 동안 여러 목숨이 생을 마치기도 하고, 더러는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기도 했다.

편안한 여행을 위한 유람 열차라 하더라도 터전을 잃고 수만리 이역으로 실려 간다면 그 참담한 심정이 오죽할까 싶은데, 거칠기 이를 데 없는 화물열차에 스무명 안팎의 사람들이 팔려가는 짐승 떼처럼 버텨야 했으니 몸과 마음 모두 얼마나 힘들고 불안했을까. 더구나 시베리아의 9∼10월은 겨울이다. 칼바람 들이치는 화물열차에서의 먹기를 제대로 할까, 씻기를 제대로 할까. 어떻게든 버텨야 했고, 쓰러지면 끝인 극한 상황이었다.

돌아보면 통탄스럽고, 내다보면 더욱 막막한 지옥열차. 도중에 쓰러진 사람 중 운이 좋은 경우는 잠시 정차하는 곳에서 눈속에라도 묻었지만 대부분은 달리는 열차에서 밖으로 던졌다고 한다. 우리 옆을 지나간 화물 열차가 그때의 기차는 아니겠지만, 그런 화물열차에 짐짝처럼 실려가는 동안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나라 잃은 유민들의 서러움을 감히 헤아릴 수 있다는 말조차 꺼내기 어려웠다.

1937년 중앙아시아 우슈토베로 강제 이주당한 고려인들 모습
1937년 중앙아시아 우슈토베로 강제 이주당한 고려인들 모습

스탈린이 연해주 한인을 강제 이주시킨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연해주 일대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항일운동의 기운이 점점 넓어지면서 일본의 대 러시아 외교압박이 심해지자 이를 피하기 위해 한인들을 이주시켰다는 시각도 있고, 생활력 강한 한인들이 집단으로 모여 있으면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세력이 될 가능성이 있어 미리 소개(疏開) 하였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또 다르게는 한인들의 탁월한 영농능력과 생존력을 이용하여 중앙아시아의 버려진 땅을 개간하려 했다고 하는 설도 있다.

어느 경우든 한인들의 자유의지에 따른 이주가 아니라 그동안 일군 터전과 재산을 모두 남겨둔 채 맨몸으로 실려 가서는 극한의 땅에 팽개쳐졌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조희문은 누구인가?

조희문 평론가
조희문은 좌파일색인 한국 영화계에서 거의 유일한 우파 영화 평론가(영화학 박사)다.
경인일보 문화부장을 거쳐
상명대 영화전공 교수,
인하대 연극영화과 교수,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
한국영화학회 회장 등 평생을 영화 관련 평론과 학술사업에 종사했다.
최근에는 좌파와의 역사문화전쟁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rsfnews@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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