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독립투쟁 허리 꺾은 자유시 참변 『건국 70주년 2만리 역사기행』⑤
무장독립투쟁 허리 꺾은 자유시 참변 『건국 70주년 2만리 역사기행』⑤
  • 조희문 평론가
  • 승인 2018.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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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水金 연재 역사 기행

코리아글로브와 역사정립연구소는 건국 70년을 기념하기 위해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스보보드니, 이르쿠쿠츠크 등 연해주 일대와. 새로운 삶을 찾아 국경을 넘어간 수많은 동포 한인들이 강제로 이주 당했던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까지 망국과 유랑의 흔적을 따라 갔다.

 

우수리스크의 최재형
우수리스크의 최재형 생가

라즈돌리노에 역에서 버스로 1시간여를 달린 뒤 우수리스크의 최재형(1860-1920) 생가를 찾았다. 연해주 한인들 중에서는 남다르게 재산을 일구어 연해주 일대 독립운동가들을 물심 양면으로 후원했던 정신적인 지주 최재형 선생이 1919년부터 1920년까지 살았던 곳이다. 노비였던 최재형의 부모는 가족을 이끌고 새로운 삶을 찾아 러시아로 이주했고. 어린 최재형은 러시아 학교에 들어갔다.

어렵사리 학업을 계속하던 중 열두살 때 가출하여 조그만 상선의 선원 생활을 시작했다. 몸을 아끼지 않고 뛰어다니는 그를 성실하게 본 선장은 친구의 큰 가게에 소개시켜 주었다. 그곳에서 사업 감각을 익혔다. 이후 젊은 나이에 재산을 모은 최재형은 연해주 일대의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는 한편 젊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여 장래 지도자를 양성하는 등의 노력을 기우렸다.

그는 연해주 일대에서 존경과 신뢰를 받는 대표적 독립운동가로 꼽혔다. 그럴수록 일본군의 감시가 그를 향했다. 1920년 4월 5일 새벽 일본군은 우수리스크 블로다르스코고 거리 38번지 소재 최재형의 집을 습격했다. 끌려가면서도 가족들에게는 ‘걱정하지말라’고 진정시키려 했지만, 그 말은 마지막 유언이 되었을 뿐이다. 일본군에게 끌려간 최재형은 이틀 뒤 총살당했다. 인근 한인들과 독립운동가들이 집단 학살당한 ‘4월 참변’의 희생자 명부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으니 애통할 따름이다.

신한촌 기념비. 사진 조희문

블라디보스토크 언덕에 서있는 신한촌 기념비는 1999년 광복절에 3.1운동 80년을 기념하여 해외한민족연구소가 세웠다고 한다. 세 개의 기둥은 각각 한성정부, 상해임시정부,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를 상징한다고 한다.

비석 면은 아무런 표식이나 글씨가 없는 상태의 백면(白面)인데, 일행 중 누군가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우리 선조 동포들이 겪은 수난과 한의 사연을 어찌 필설로 다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차라리 보는 사람이 미루어 헤아리라는 뜻으로 빈 벽을 둔 것이 아니겠는가”라는 해설을 한다. 꿈보다 해몽이 좋다는 말을 하지만 바로 이런 경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을까.

다음 목적지는 스보보드니 참변지를 찾는 것. 이번 답사의 중요한 과정 중의 한 곳이다. 블라디보스토크 역을 출발한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 25시간을 보내고서야 스보보드니 역에 내렸다. 역사(驛舍) 3층에 숙소를 정했다. 철도 연장이 긴 탓인지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머무는 역사에는 대부분 숙박시설을 갖추고 있는 것 같았다. 3층에 있는 숙소지만 기차에서 내려 그곳까지 가는 길은 험난했다. 에스컬레이트도, 엘리베이터도 없이 오로지 계단을 올라야 했다. 여행 짐을 들고 여러 번 오르락 거리는 동안 은근한 짜증이 올라온다.

라즈돌리노에 빠셜록 언덕에 서있는 자유시 참변 추모비. 독립군 부대들간의 단순 갈등 사건으로 왜곡하고 있다. 사진 조희문
라즈돌리노에 빠셜록 언덕에 서있는 자유시 참변 추모비. 독립군 부대들간의 단순 갈등 사건으로 왜곡하고 있다. 사진 조희문

1928년 6월 28일, 제야(Zeya) 강변의 알렉세예브스크 마을(지금은 스보보드니로 부름)에 주둔하고 있던 3500여 명의 대한독립군단이 무장해제 과정에서 러시아 적군(赤軍) 제29연대와 그 지휘를 받는 한인보병 자유대대의 공격을 받아 궤멸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상해 임시 정부에서는 이를 ‘자유시 참변’ 이라고 불렀다. 더러는 사건이 일어난 곳이 중국의 흑하와 가까운 곳이라 하여 ‘흑하사변’(黑河事變)이라 부르기도 한다.

자유시(스보보드니시) 로 들어가는 입구의 도로 표지판/ 사진=자유시 최영재 기자

참극이 벌어진 곳의 제야강은 200㎞ 쯤을 더 흐르면 블라고베센스크 부근에서 아무르강(흑룡강)과 합류한다. 아무르강을 경계로 러시아와 중국이 국경을 이루고, 강 건너에는 블라고베센스크와 마주 보듯 흑하시(黑河市)가 자리 잡고 있다.

1920년, 중국 만주 일대의 삼둔자(三屯子), 봉오동, 청산리 전투 등에서 독립군이 일본군 정규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지만 그만큼 일본의 보복 반격은 거세졌다. 단위 전투로만 한정한다면 독립군의 승리였지만, 일본군 입장에서는 자존심과 체면을 크게 상한 뼈아픈 패배였다. 무장 독립군 저항세력을 방치했다가는 그 여파가 어디까지 미칠지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이 된 것이다.

대한독립군단이 주둔해 있던 수라세프카역의 급수탑, 이곳서 소련 붉은군대의 공격을 받고 괴멸됐다./사진=최영재 기자
대한독립군단이 주둔해 있던 수라세프카역의 급수탑, 이곳서 소련 붉은군대의 공격을 받고 괴멸됐다.  /사진=최영재 기자

일본은 독립군 토벌과 독립군을 지원하는 일대 한인들을 제거하기 위해 북만주 일대와 연해주 지역의 한인 마을을 습격하여 동포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하거나 체포했다. 북만주지역에서는 1920년 8월 소위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間島地方不逞鮮人剿討計劃)을 작성하고 첫 단계로 ‘훈춘사건’을 조작하였다. 일제는 중국 마적을 매수하여 1920년 10월 2일 훈춘의 민가와 일본영사관 분관을 습격, 13명의 일본인과 한국인 순사 1명을 살해하고 30여 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일제는 이 사건을 적극적으로 선전하고 중국 측에 피해 보상을 요구했다.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직접 병력을 투입하여 마적단을 토벌하겠다고 압박했다. 그리고 중국 측의 답변이 있기도 전에 일제는 대병력을 서북간도로 침입시켰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한인들과 독립운동가들이 학살당했다. 미리 목적을 설정하고 벌인 자작극의 예정된 수순이었다.

독립군과 소련 적군의 교전 현장인 철길, 이 철길을 타라 소련군들은 장갑차로 대포로 독립군을 무차별 살육했다./ 사진=최영재 기자
독립군과 소련 적군의 교전 현장인 철길, 이 철길을 따라 소련군들은 장갑차와  기관총, 대포로 독립군을 무차별 살육했다.    /사진=최영재 기자

러시아 연해주 일대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일본군은 연해주 일대에 군대를 파견하여 연해주 지역 독립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신한촌 마을을 초토화 시켰다. 교회, 학교, 신문사 등을 비롯하여 일반 가옥까지 불태웠다. 수백 명이 죽고 3천여 명이 체포되었다. 1920년에 자행된 이 사건을 가리켜 ‘4월 참변’ 또는 ‘신한촌 참변’이라고 한다.

1917년 러시아는 볼셰비키 혁명으로 혼란에 빠졌다. 혁명파인 볼셰비키(적군)와 제정 러시아 정부군을 지지하는 멘셰비키(백군)로 나뉜 채 내전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일본은 시베리아 지역 일본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시베리아에 군대를 파견했고, 백군을 후원했다. 1920년에 벌어진 적군과의 전투에서 일본은 수세에 몰린다.

독립군이 괴멸된 제야강 현장, 강 저 멀리 시베리아횡단철도의 철교가 보인다./사진=최영재 기자
독립군이 괴멸된 제야강 현장, 강 저 멀리 시베리아횡단철도의 철교가 보인다./사진=최영재 기자

이 전투에서 러시아 한인들 중 일부가 적군 편에 합류했다. 3월 무렵에는 러시아 적군이 일본인을 공격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자 일본은 적군을 지지하는 한인과 러시아인들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4월 참변’은 그 처참한 결과였다.

rsfnews@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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