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 독립보다 赤化혁명 『건국 70주년 2만리 역사기행』⑥
공산당, 독립보다 赤化혁명 『건국 70주년 2만리 역사기행』⑥
  • 조희문 평론가
  • 승인 2018.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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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水金 연재 역사 기행

코리아글로브와 역사정립연구소는 건국 70년을 기념하기 위해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스보보드니, 이르쿠쿠츠크 등 연해주 일대와. 새로운 삶을 찾아 국경을 넘어간 수많은 동포 한인들이 강제로 이주 당했던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까지 망국과 유랑의 흔적을 따라 갔다.
우리 독립군이 소련 공산군에게 학살당한 제야강변, 지금은 한가로운 휴양지다./사진=스보보드니 최영재 기자
"역사 왜곡의 실제 현장을 보는 것은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한 지금 이 시각 우리의 독립운동을 왜 계속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북만주 일대와 연해주 지역 무장 독립운동을 하던 여러 부대들은 거세지는 일본의 압박을 피하고 전열을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연해주 이만 지역(달네레첸스크市 당시 지명 '이만')을 거쳐 자유市로 집결하게 되었다. 상해 임시정부와 새로 들어선 소비에트 혁명정부 간 합의도 있었다. 이때만 해도 상해 임정은 소련 정권의 이념적 실체나 전술전략적 간계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한 채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지원세력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제정세 읽지 못한 독립운동 

이 무렵 러시아 연해주에서는 2개의 한인 공산당 조직이 등장한다. 이동휘가 중심이 된 한인사회당(1918), 김철훈, 오하묵 등을 중심으로 한 전로한인공산당(全魯韓人共産黨, 1919)이 다. 한인사회당은 이동휘(李東輝)의 주도로, 박진순(朴鎭淳, 박 미하일), 박애(朴愛, 박 마다베이), 김립(金立) 등의 참여로 그해 8월 26일, 하바로브스크에서 창립총회를 가졌다. 이동휘는 ‘독립운동의 숙원을 이루고자 유력한 정부의 협조를 얻기 위하여 한인사회당을 창당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소련 정권과 손잡은 것은 독립운동에 도움을 받기 위한 전략이라는 것이다.

◇독립운동 과정에 공산주의 이념이 파고들어

이에 비해 전로한인공산당은 소련 볼셰비키의 통제와 지시 아래 만들어진 공산당 한인지부의 성격을 띠었다. 연해주 지역의 한인들을 볼셰비키 세력으로 흡수하여 세력화 한 뒤 백군 세력과 대적하는 것이 목표였다.

한인사회당이 전략적으로 소련 정권과 손잡고자 한데 비해 전로한인공산당은 처음부터 볼셰비키의 조종에 의하여 만들어졌고, 연해주를 포함한 소련 전역의 한인들을 볼세비키로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는 점에서 노선의 차이가 뚜렷했다. 하지만 볼셰비키와 손잡은 것이 전략적이든, 처음부터 목적이었든 독립운동 과정에 공산주의 이념이 파고들기 시작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시베리아횡단철도가 정차하는 역에는 반드시 소규모 장이 열린다. /사진=조희문

한인사회당은 1919년 3.1운동 이후 근거지를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겼으나 그해 8월 이동휘가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임명된 것을 계기로 주축 인물들이나 활동도 상해로 옮겨가게 된다. 그곳에서 여운형 등을 규합하여 1920년에 ‘공산주의자 그룹’을 결성했고, 1921에 들어 ‘고려공산당’으로 당명을 바꾸었다. 이들을 가리켜 상해파 고려공산당이라고 부른다.

다른 갈래인 이루쿠츠크 공산당 그룹은 전로한인공산당(1919)을 거쳐 전로고려공산당(1920.7)으로 개칭했다가 이듬해 다시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1921.5)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두 개의 고려공산당이 생긴 것인데, 각각 상해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으로 구분한다. 2개의 공산당은 이념적 성향이나 추종 세력이 달랐기 때문에 공산주의 운동의 주도권을 잡는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했다.

◇ 소련 공산 정권은 극동 지역의 백군 잔당 색출에 한인 독립군 이용,  ‘한반도의 공산화’ 실현 노려

1920년 11∼12월 사이 만주 일대에 대한 일본군의 토벌작전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자 곳곳의 독립군 부대는 밀산으로 집결하여 병력을 재편성하고 대한독립군단을 출범했다. 3대대 9중대 27소대 3,500여명 규모였다. 일단 밀산에서 부대를 새롭게 편성한 대한독립군단은 연해주 스보보드니(이만, 알렉세예프스크, 자유시 등으로 불림)로 이동했다.

중국 흑룡강성 밀산시의 향토사학자 맹고군씨가 대한독립군단의 이동루트를 설명하고 있다./사진=중국 밀산 최영재 기자

대한독립군단이 스보보드니로 이동한 것은 상해 임시정부와 소련 레닌 정부와의 협약에 의한 것이었다. 레닌 정부는 한인을 비롯하여 일본, 중국, 몽골 등 각국의 헉명 성향 청년들을 규합하는 ‘국제원동혁명군’(國際遠東革命軍) 편성을 바랐다. 이 문제는 1920년 상해 임정이 모스크바에 파견한 대표 한형권과 레닌 정부 사이에 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에서 소련은 조선독립군의 항일투쟁 지원을 하겠다고 밝혔다. 협정 후 임정의 노백린(盧伯麟) 군사업무총장은 각 독립군 부대에게 스보보드니로 집결하여 함께 군사훈련을 하고 무기 지원도 받자고 공지했다. 상해 임정의 입장은 소련 정권과의 전략적 제휴였고, 소련 공산 정권의 계산은 극동 지역의 백군 잔당 색출에 한인 독립군을 앞세우고, 궁극적으로는 ‘한반도의 공산화’를 실현하려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다른 생각끼리 만난 것이지만 상해 임정 지도부에서는 공산당의 전략을 알 리 없었다.

◇ 소련은 일본과의 외교적 분쟁 두려워

이렇게 하여 스보보드니에 집결한 독립군 부대들은 고려혁명군관학교를 세워 새로운 체계로 군사훈련을 시작하는 한편 적군과 협력하여 백군 잔당들을 진압하는 작전에 참여했다.

그러나 새로 구성된 부대에 대한 통수권을 사이에 두고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는 심각한 알력을 빚었다. 어느 쪽이 군권을 장악하는 가의 문제는 군부대의 성격과 역할에도 영향을 미치는 문제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소련 땅에서, 소련 공산당의 지원을 등에 업은 이르쿠츠크파의 우세로 기울었다.

김좌진 장군 동상
김좌진 장군 동상

하지만 무장독립군의 집결과 백군에 대한 공격은 일본을 자극했다. 일본은 소련 정부에 강력한 항의를 제기하는 한편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공산혁명을 하기는 했지만 정치적 안정단계에 이르지 못한 소련은 일본과의 외교적 분쟁을 일으키는 것을 두려워했고, 결국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소련 정권의 태도가 협상 당시와는 크게 달라진 것이다.

독립군 부대에 대한 무장해제 명령이 하달되었다. 당연히 독립군 부대들은 거절했다. 김좌진 장군의 경우는 공산주의자들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나며 일부 병력을 이끌고 만주로 돌아갔지만 대부분의 부대는 되돌아가지도, 무장해제 명령에 따르지도 못한 채 내부 논의를 거듭했다.

◇ 무장하지 못하는 군인, 훈련도 전투도 없는 군인은 이름만 군인

대한독립군단의 주둔지였던 수라세프카역 근처, 여기에 주둔한 우리 독립군을 공산당 계열 독립군과 소련 29연대 병력이 중화기로 무차별 살상했다
/사진=러시아 스보보드니 최영재 기자  

그러는 사이 6월 28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무장부대 ‘자유대대’가 앞장선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2군 산하 자유시 수비대 29연대의 대포와 중기관총이 사격을 퍼부었고, 독립군 부대는 궤멸되었다. 960여 명의 사망자와 실종자를 기록했고 1800여명이 포로가 되었다. 이로 인해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존립하던 무장 독립군은 사실상 소멸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포로로 잡힌 독립군 부대원들은 이르쿠츠크 공산당 산하 고려혁명군 부대에 예속되었다. 고려혁명군은 한 때 만주로 출동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의 지시에 따라 만주출동계획을 중지하고 스보보드니에서 이르쿠츠크로 회군했다. 이르쿠츠크에 주둔하게 된 고려혁명군은 1921년 8월 말 1개 여단으로 재편되어 적군(赤軍) 제5군단 산하 부대로 예속되었다.

이르쿠츠크 5군단 거리는 무장 해제된 채 적군의 포로가 된 독립군 각 부대원들이 주둔하였던 곳이다. 지금은 도로 양쪽으로 집들이 들어서고 시가지 모양을 갖추고 있지만 당시는 러시아 넓은 땅의 한 부분이었을 것이다. 새로운 부대로 편성되기는 했지만 부대원들에게는 무장이 허용되지 않았고, 특별한 임무도 부여되지 않았다.

무장하지 못하는 군인, 훈련도 전투도 없는 군인은 이름만 군인일 뿐 하릴없는 사역병이나 다름없었다. 옛 독립군 부대로 귀환하는 것도, 전투에 참여하게 해달라는 청원도 모두 무시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사이 항일 무장 투쟁에 나섰던 독립군 용사들은 날개 잃고 발톱도 뽑힌 채 철창 안을 왔다 갔다 하는 동물원 우리 속의 짐승 처지로 바뀌어 갔다.

자유시 참변은 제국주의 열강들의 탐욕스런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격동의 와중에서 나라를 지키지 못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망국의 후예들이 적색 제국주의 소련에게 치명적인 배신을 당한 사건이다.

라즈돌리노에 빠셜록 언덕에 서있는 자유시 참변 추모비. 독립군 부대들간의 단순 갈등 사건으로 왜곡하고 있다.
빠셜록 언덕에 서있는 자유시 참변 추모비.
그러나 추모비의 내용은 독립군 부대들간의 단순 갈등 사건으로 왜곡하고 있었다.

스보보드니 강이 내려다 보이는 인근 빠셜록 산 중턱을 오르는 어느 언저리에 누가 세웠는지 밝히지 않은 자유시 참변 추모비가 눈에 들어온다. 수년 전, 어느 방송에서 제작한 ‘홍범도’라는 프로그램에 잠시 소개된 것을 본 적이 있었지만 실물로 마주 대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 비는 ‘흑강 자유시 사건’이라고 지칭하며 ‘다시는 우리끼리 싸우는 일이 없기를’이라는 유감인지, 기원인지를 담고 있다.

시베리아횡단철도 내부의 간이매점 판매대

먼 낯선 땅에 자유시 참변을 추모하는 추모비를 세울 정도라면, 역사에 관심이 있고 당시 사태의 내용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단체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흑하사건’이라는 표현 속에서 참변의 경과를 그저 그런 여러 사건 중의 하나인 것처럼 축소시키려는 의도가 읽히고, ‘다시는 우리끼리 싸우는 일이 없기를’이라는 주문에서는 사태의 성격을 독립군 내부의 갈등이라는 것인지, 공산당 파벌간의 다툼을 가리키는 것인지 혼란스럽게 만든다.

라즈돌리노에 강변에서 대한독립군단 추모행사를 마친 일행들
제야강변에서 대한독립군단 추모행사를 마친 일행들

단체의 규모나 성격을 헤아린다면 이념지향이 분명할 터이니 더 이상 파벌싸움을 하지 말자는 자아비판의 다짐처럼 보이기도 한다. 유추하면, 공산당 세력 간의 다툼으로 생긴 사건이니 앞으로 그런 과오를 재현하지 말자는 이념단체들 간의 경고성 방문(榜文)이나 다름없다.

역사 왜곡의 실제 현장을 보는 것은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한 지금 이 시각 우리의 독립운동을 왜 계속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jayooilbo@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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