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르쿠츠크 5군단 거리에서" 『건국 70주년 2만리 역사기행』⑧
"이르쿠츠크 5군단 거리에서" 『건국 70주년 2만리 역사기행』⑧
  • 조희문 평론가
  • 승인 2018.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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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水金 연재 역사 기행

"역사는 어느 순간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쉼 없이 흐르며 영욕과 명암을 담는 것이리라"

코리아글로브와 역사정립연구소는 건국 70년을 기념하기 위해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스보보드니, 이르쿠쿠츠크 등 연해주 일대와. 새로운 삶을 찾아 국경을 넘어간 수많은 동포 한인들이 강제로 이주 당했던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까지 망국과 유랑의 흔적을 따라 갔다.

 

이르쿠츠크 5군단 거리 풍경(사진 조희문)
5군단 거리
러시아 이르쿠츠크 시내에는 "5군단 거리"라는 것이 있다. 볼세비키 혁명 부대 5군단이 주둔하던 곳이다. 이 중에는 특별한 부대가 있었다. 조선인으로 구성된 특립고려여단으로 여단장은 칼란다라슈발리에 이어 오하묵이 맡았다. 여단의 군정위원장은 박승만이었다. 자유시 참변 이후 여러 경로로 떠돌던 한인 무장대원과 이르쿠츠크의 고려인들이 부대원이 되었다. 20개 중대에 2천 명이 넘었다. 

다음날 '5군단거리'를 돌아보며 다시 한번 자유시 참변과 그 이후의 과정을 돌아보며 스러져간 독립군들의 통한을 되새겼다. 역사에서 가정(假定)은 부질없는 일이지만, 만약 자유시에 집결한 독립군 무력이 그대로 유지되고, 한반도 침공작전에 참여하였다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승전국 지위를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남북분단도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5군단거리를 둘러본 뒤 일행이 찾은 곳은 키로바 광장. 체코 군단과 관련한 이야기가 전하고, 그 이야기는 독립군의 무장 투쟁 승리와도 이어진다.

‘체코 군단’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트리아군에 강제로 징집되었다가 러시아군에 잡힌 체코 출신 포로를 독일·오스트리아와 싸울 군대로 재편성한 부대를 가리킨다. 오스트리아 군에 소속되기는 했지만 오히려 적대적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 전투에 대한 의지도 그만큼 강했다.

이르쿠츠크의 유서깊은 즈나멘스키 수도원/사진=조희문

하지만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간에 강화가 진행되고, 독일과도 휴전 협정이 진행되는 등 정치적 상황이 변하면서 체코 군단의 존재도 의미가 달라졌다. 독일과 휴전협정을 맺고 연합국 대열에서 이탈한 레닌에게 체코군단은 오히려 뜨거운 감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체코군단은 독일과 계속 싸우겠다며 항전 의지를 불태웠지만 레닌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 연합국은 이런 사실을 알고 체코군단을 러시아에서 빼내 프랑스 전선에 투입하자는 제안을 한다. 그러나 체코 군이 프랑스 전선에 투입된다면 독일군과 맞서겠다는 것이니 레닌으로서는 애매한 처지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고심 끝에 선택한 방식은 체코군을 돌려보내기는 하되 최대한 시간을 끄는 것이다. 서유럽의 국경을 바로 넘기가 여의치 않다는 핑계를 대고 시베리아 철도를 돌아 선박으로 유럽 전선에 보내는 길고도 긴 여정을 골랐다. 이동을 준비하던 중 1918년 5월 우발적 사건을 빌미로 붉은 군대가 체코 병사들을 구금하자 무장을 갖추고 있던 군단 전체가 들고 일어났다.

러시아 한복판에서 운송수단을 탈취하고 붉은 군대를 피해 필사적으로 탈출하겠다는 체코군단의 봉기는 그렇지 않아도 간섭의 명분을 찾고 있던 열강에게는 좋은 구실이었다. 러시아 정세가 더욱 복잡해지는 계기로 작용한 것이다. 정치적 상황과는 상관없이 체코 군단은 천신만고 끝에 안전하게 빠져나가 고국으로 돌아갔다.

홍범도 장군 (출처 : 국가보훈처)
홍범도 장군 (출처 : 국가보훈처)

사정이 어찌 되었던 다량의 무기로 무장한 부대가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탈주를 목표로 삼으니 무기는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홍범도 등 독립군 무장 부대들은 체코군과 교섭하여 그 무기들을 구입하는데 성공한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이 대승을 거두게 된 배경에는 체코군단에게서 확보한 무기로 충분한 무장을 갖출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승리가 일본군의 보복을 부르고, 공세를 피하기 위해 독립군 무장 부대들이 소련의 자유시로 모였다가 소련 공산당의 배신에 휩쓸려 궤멸당하는 비극의 순환고리로 이어진 것을 떠올리면 역사는 어느 순간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쉼 없이 흐르며 영욕과 명암을 담는 것이라는 사실을 실감한다.

이르쿠츠크에서 찾은 다른 곳은 콜차크 제독 동상. 레닌의 공산혁명에 맞서 싸운 대표적 지도자로 꼽힌다. 지금 한국 상황에 비유한다면 ‘수구 꼴통’의 우두머리이자 ‘적폐세력’의 상징인 셈이다. 알렉산드르 콜차크(1874-1920)는 1894년 러시아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러일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에 종군했다. 1917년 2월혁명 당시에는 흑해함대의 사령관이었다.

이 무렵 한때 미국으로 파견되었다가 10월혁명 직후에 귀국하였다. 1918년 11월 옴스크의 반혁명정부의 군사장관이 되었으며, 얼마 후에는 쿠데타로 군사정권을 수립하여 연합국 측의 지지와 승인을 받았다. 전성기에는 볼가강(江) 근처까지 군대를 진격시키기도 하였으나, 결국 패퇴하여 옴스크도 함락당하고 이르쿠츠크에서 적군에게 체포되어 즉결심판을 받고 1920년 2월 총살당하는 비극을 맞았다.

콜차크 제독의 로맨스를 소재로 한 영화 제독의 연인 포스터
콜차크 제독의 로맨스를 소재로 한 영화 제독의 연인 포스터

지난 2008년 러시아연방이 제작한 영화 ‘제독의 연인’은 콜차크 제독의 일대기를 소개한 작품. 공산 세력에 맞서는 정치적 행보보다는 부하의 아내에게 연정을 느끼며 사랑(?)에 빠지는 어느 군인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영화를 보면 시대의 격동에 휘말리며 빗나간 사랑에 열정을 태우는 로맨티스트처럼 보일 뿐 거대한 공산세력에 나라의 명운을 걸고 대적하는 파이터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

근대 러시아 역사가 대부분 공산혁명의 시각에서 다루는데 비해 콜차크는 공산혁명에 맞선 소수의 인물 중 대표적인 경우로 꼽힌다. 그런 점에서 콜차크의 동상은 별달라 보인다. 공산 정권의 시각으로는 반역자이자 썩어 빠진 부르주아의 주구로 몰아 부칠 만도 한 데 오히려 기념하는 동상을 세우다니!

근대 러시아의 역사가 그만큼 격동의 과정을 겪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자신감인지, 비록 적대 세력이기는 하지만 러시아를 위한 충정을 인정한다는 것인지 쉽게 헤아리기 어렵지만 어떤 이유로던 콜차크의 동상이 당당하게 서있는 것 자체가 정치적, 이념적 화해 또는 포용을 상징하는 듯 하다.

콜차크의 동상 기단 부분에 장식처럼 새겨진 부조(浮彫)는 러시아 백군과 적군의 모습을 각각 표현하고 있다. 백군과 적군의 대립과 갈등 위에 콜차크가 있다는 의미로 읽힌다. 러시아의 자신감을 표현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콜차크 제독의 동상 .백군과 적군의 대립 이미지를 바탕에  깔고 있는 부분이 눈길을 끈다.
콜차크 제독의 동상 .백군과 적군의 대립 이미지를 바탕에 깔고 있는 부분이 눈길을 끈다.

콜차크 동상 바로 뒤에 즈나멘스키 수도원이 있다. 그곳 사람들 뿐 아니라 여행안내서 같은 자료들에서는 즈나멘스키 수도원을 먼저 소개하는 경우가 태반이고, 콜차크 동상에 대해서는 빠지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을 참고로 한다면 ‘즈나멘스키 수도원 앞에 콜차크 동상이 있다’고 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터이다.

이르쿠츠크에서는 역사가 오랜 명소로 꼽힌다. 안으로 들어가니 미사가 한창이다. 우리 일행이 무게를 둔 것은 콜차크 제독 동상이었지만 수도원과 아우르면 러시아의 중세와 근대 역사가 서로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대한민국의 역사는 제대로 흐르고 있는 것일까.

rsfnews@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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