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훤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한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유치환(1908~1967)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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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토닉러브라는 말이 있다. 육체를 무시한 순수한 정신적 연애라는 뜻이다. 어떤 이는 그런 연애란 애당초 없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말한다. 사실 플라토닉러브는 플라톤과 무관하다. 플라톤의 사랑은 지혜와 철학을 향한 것인데, 그 사상이 심오하다보니 그런 말이 생겨났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고,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다’는 표현은 자신을 향한 것이라기보다 상대방을 향한 역설적 표현이다. 사랑해본 사람은 안다. 사랑에는 아픔과 괴로움이 뒤따른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였다는 것은, 나는 아픔과 괴로움을 극복하고 오히려 행복하니 당신 또한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표현이 생략된 것이다. 상대방에 대한 극도의 배려가 낳은 문장이다.

유부남이었던 유치환은 통영여중 교사로 근무할 때 알게 된 이영도에게 20여 년 동안 거의 매일 편지를 썼고, 이영도는 그것을 소중히 보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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