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동식
주동식

지난 3월 10일 국회의사당 잔디광장에서 진행된 윤석열 20대 대통령 취임식의 하이라이트는 취임사 낭독이었다.

‘이 나라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기반으로 국민이 진정한 주인인 나라로 재건’하고, ‘국제사회에서 책임과 역할을 다하는 나라로 만들어야 하는 시대적 소명’이라는 첫머리부터 전율로 다가왔다. 민주주의의 위기로 ‘반지성주의’를 지목하는 데서는 ‘이건 선전포고’라고 느꼈다.

언론은 35번이나 등장한 ‘자유’라는 어휘에 더 주목했지만, 필자는 반지성주의가 갖는 함의가 훨씬 크다고 봤다. 자유의 가치가 추상적인 반면, 반지성주의는 훨씬 더 실천적인 맥락에서 의미가 크다고 판단한 것이다.

반지성주의는 구체적으로 어떤 현상에 대한 지적일까? 그것은 대깨문과 좌파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해온 ‘사람이 먼저’ 또는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명제의 부작용일 것이다.

‘사람이 먼저’라는 말은 인간 본위 즉 휴머니즘을 강조한 것처럼 보이기 쉽다. 하지만 좌파들이 말하는 ‘사람’은 물질세계의 법칙 즉 과학이 칼처럼 적용되는 현실 세계와 대립하는 관념의 세계를 지칭한다. 현실세계에서는 도저히 실현될 수 없는 명제가 관념의 세계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해진다.

사람이 높은 언덕에서 떨어져도 죽지 않고, 유한할 수밖에 없는 자원을 아무리 써도 소진되지 않는다. 이런 세상에서 중요한 것은 과학과 이성, 합리주의가 아니라 울컥 뭉클하는 감성이다. 하지만 이성과 합리가 아닌 감성에 근거한 판단이나 결정이 불러온 결과에 대해서는 좌파 진영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단순 해상 교통사고인 세월호 유족들에게 국민 세금으로 엄청난 보상금과 각종 혜택을 주고, 거기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견을 말하면 마치 종교재판이라도 하듯이 언론과 SNS 등에서 일제히 공격에 나섰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여기에는 어떤 합리적인 근거도 없었다. 유일한 근거가 ‘애들이 죽었잖아요?’라는 감성 호소 딱 그것이었다. 이런 집단 정신병의 근저에 깔린 것이 ‘사람이 먼저’라는 명제였다.

이런 현상은 뿌리가 깊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이다. ‘바보 노무현’으로 불리며 감성에 호소하는 팬덤 정치를 하다가 뇌물수수혐의로 수사를 받자 목숨을 끊은 노무현은, 그 자살로 인해 친노 세력의 죄업에 면죄부를 주고 스스로는 우상의 반열에 올랐다. 일각에서 친노 세력을 ‘관장사’ ‘시체장사’라고 비아냥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난 23일 치러진 노무현 전 대통령 추도식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타났다. 가수 강산에가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르자 문재인 전 대통령의 부인 김정숙 씨가 어깨를 들썩거리며 춤을 추는 모습이 포착된 것이다. 이를 비판하는 여론에 맞서 친노 진영은 ‘노무현 추도식은 축제’라고 변명하고 있다. 하지만, 추도식이 축제라는 이 변명에서 관장사나 시체장사의 의도가 읽힌다고 하면 이들은 뭐라고 변명할까.

반지성주의는 합리성과 거리가 멀기 때문에 현실적 정합성 따위는 우습게 여긴다. 표현의 앞뒤가 맞지 않을수록, 엉터리일수록 훌륭하다고 여긴다. 그런 사례는 너무 많지만 문재인 전 대통령이 SNS에 올린, 노무현 추도식에 참석한 소감도 이런 샘플로 손색이 없다.

"우리는 늘 깨어있는 강물이 되어 결코 바다를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처럼."

강물이 깨어있어 바다를 포기하고 말고 하나? 초딩 소녀같은 유치찬란한 감성이지만, 이런 게 한국 정치에서 오랫동안 거창한 정치적 메시지로 통용되어왔다. 이런 감성팔이가 대한민국을 망친 것을 따지자면 몇십 년의 세월로도 부족할 것이다. 이런 저능한 행태는 유통 기한이 다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반지성주의’에 대한 질타는 바로 이런 저질 행태에 대한 불퇴전의 선전포고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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