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극장 앞에서...『건국 70주년 2만리 역사기행』⑩
고려극장 앞에서...『건국 70주년 2만리 역사기행』⑩
  • 조희문 평론가
  • 승인 2018.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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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水金 연재 역사 기행

고려극장, 한인 교포들의 문화 기지

연해주 시절부터 지금까지 면면

신문사 방문을 끝낸 뒤 고려극장을 찾았다. 고려극장은 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이 노년의 최후를 여기서 맞았다 하여 자주 회자되는 곳으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한 한인들의 눈물과 한숨이 서려 있다고 생각했던 곳이다. 전날, 방문을 위해 극장에 문의를 시도했지만, 지금까지 사용했던 시설은 문을 닫았고, 새롭게 개관할 건물은 현재 수리 중이라 정상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사실만 겨우 확인하였을 뿐이다. 극장 단원들도 모두 휴가 중이라 연락하기 어렵다는 말과 함께. 그래도 현장을 가보기로 하고 두어 시간의 길을 달려 문을 닫은 건물에 닿았다. 관리인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안을 좀 볼 수 있느냐고 물으려 했지만 손사래를 치며 아예 거절한다. 대답을 안하려 것이 아니라 아예 접촉 자체를 피하겠다는 태도다. 단호하고 완강한 기세에 밀려 주변만 돌아볼 수 밖에 없었다. 마당의 나무 그늘 아래 서울 시내 버스 한 대가 보인다. ‘Hi, SEOUL'이란 글자판이 선명하다. 사용을 중지한 극장 마당에 서있는 것으로 보아 운행 목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전시용 기념품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국을 생각하는 고려인 동포들 입장에서는 서울에서 운행하는 시내버스 실물을 보는 것만으로도 작은 위안이 되겠다 싶기도 하다. 서울시가 후원을 한 것인지, 교민단체나 어느 교회나 종교단체 등에서 교류, 지원 사업의 결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서울 시내버스를 예상치 못했던 장소에서 볼 수 있었던 인상은 강렬했다.

새로 옮겨간 고려극장. 알마티 도심에 있다.(사진 조희문)
새로 옮겨간 고려극장. 알마티 도심에 있다.(사진 조희문)

고려극장은 원래 연해주에 있었던 시설이다. 시설이었다기 보다는 공인 단체 성격이 강했다. 물론 고정된 장소로서의 시설도 갖추지 못했다. 이동이 가능한 가설극장에 고려극장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 하다.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 공산혁명은 러시아 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에도 충격적인 영향을 미쳤다. 프로레타리아 노동자 농민이 세상의 주인이 되고, 모든 생산은 함께 하고 골고루 나눈다는 이념과 주장은 가난과 억압에 시달리고 있던 사회적 하층민은 물론이고,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인텔리겐차들도 열광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치, 경제 분야뿐 아니라 문화예술 분야에도 바람을 일으켰다. 모든 예술 매체는 당의 혁명 이념 선전과 교육을 위한 수단으로 기능하는 것이 정당한 역할을 하는 것이며, 퇴폐적 오락이나 부르주아 자본가 계급을 위한 낭비적 봉사를 하는 것은 엄중한 타도의 대상으로 몰아부쳤다.

지금은 문을 닫은 고려극장의 벽에 그린 이미지
지금은 문을 닫은 고려극장의 벽에 그린 이미지(사진 조희문)

1920년 후반, 일제강점기 시절의 한반도에서도 유행처럼 번졌던 사회주의 문화예술 운동은 그 시대의 유행이고 정의처럼 통했다. 조선프로레타리아예술가동맹( 약칭 카프, KAPF)은 중심 조직이었다. 영화를 비롯하여 연국, 미술, 음악, 문학 등 각 분야에서 공산주의를 찬양하고, 노동자 농민은 분연히 일어나 모순적인 체제와 계급을 타도해야 한다는 선동을 시도했다.

연해주 일대에서도 당연히 좌파 문화예술 운동이 번졌고, 소설이나 연극 등에서 흐름이 두드러졌다. 연극분야에서는 소규모 동인들끼리 극단을 조직하여 공연을 하는 사례가 산발적으로 생겼는데, 이른바 소인극(素人劇) 활동이다. 요즘 용어로 치면 몇몇 생각이 맞는 사림들끼리 하는 아마추어 연극이라고 할 수 있다.

연해주 일대에서도 볼셰비키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그룹들이 여럿 생긴 것으로 추정되는데, 신한촌의 ‘소인예술단’, 블라디보스토크의 ‘노동자청년극장’ 같은 단체들이다. 이런 단체들이 늘어나고 활동이 확산되자 공연장으로서의 극장을 설립해야 한다는 시도가 나타났다. 1930년 블라디보스토크 노동자청년극장 설립이 이루어졌고, 1932년 9월에 이르러 소련 정부의 결정으로 극동지역 고려극장이 만들어졌고, 노동자청년극장 단원들은 여기에 흡수되었다. 공산주의 체제 내에서는 문화예술 활동이 영리를 위한 사업이 아니라 당의 이념과 정책을 선전하는 수단으로 기능하기 때문에 정부 차원에서 시설을 제공하고 소속 단원이나 직원들은 급여를 받는 국립시설로 운영되는 것이 보통이다.

고려극장 입구 풍경(사진 조희문)
고려극장 입구 풍경(사진 조희문)

1937년 강제 이주 당시 극장 구성원 대부분은 카자흐 공화국 크즐오르다 지역으로, 일부는 우즈베크 공화국의 타슈켄트 인근 벡테미르로 이주했다. 고려극장은 두 곳으로 나뉘어 각각 활동을 이어갔다. 그중 크즐오르다에서 활동하던 카자흐 고려극장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2년 1월 13일 한인들의 강제이주 최초 정착 지역이었던 우슈토베로 이전하였는데, 전쟁 중이라 소련 정부의 지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상황이 어려워지자 동포들이 밀집 거주하면서 벼를 재배하고 있었던 우슈토베에서는 그나마 생계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1959년 5월 30일 고려극장은 카자흐 공화국 정부의 결정에 따라 다시 원래 극장이 있었던 크즐오르다로 이전하여 크즐오르다주 주립 고려극장이 되었으며, 1964년 1월부터는 카자흐공화국 고려 음악연극극장으로 격상되었다. 크즐오르다로의 이전은 정부 지원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졌다는 뜻이며 고려 음악연극극장으로 격상된 것은 공연 성과에 대한 평가가 좋았다는 의미다.

고려극장 마당에 서있는 서울시내버스. Hi, Seoul 표시가 선명하다.(사진 조희문)
고려극장 마당에 서있는 서울시내버스. Hi, Seoul 표시가 선명하다.(사진 조희문)

1968년 고려극장은 카자흐 공화국 수도인 알마티로 다시 이전하게 되는데, 명칭은 카자흐공화국 국립 음악희곡 고려극장이 되었다. 이는 고려극장이 주립극장에서 국립극장으로 승격되었음을 의미했고, 같은 해에 극장 공연팀의 일원으로 아리랑 가무단이 창설되었다.

소비에트 연방(소련)이 해체되는 과정에서도 고려극장은 새로 등장한 카자흐스탄 정부의 후원을 계속 받을 수 있었으니 고려인(한인) 사회에서 고려극장의 역할과 기능이 소수민족의 결속과 카자흐스탄 정부와의 신뢰확산에도 상당한 성과를 반증하는 결과로 볼 수 있다.

우리 답사단 일행이 보았던 ‘고려극장’의 모습은 알마티 시내 외곽에 있던 바로 그 극장이다. 알마티의 고려극장은 카자흐 공화국이나 소련정부의 후원이 그만큼 넉넉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오랫동안, 극장위치가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관객의 접근이 불편하다는 지적이 많았는데, 그 지적이 타당하다고 여겼는지, 카자흐스탄 정부는 알마티 시내의 중심지에 위치한

카자흐스탄 국립아카데미 오케스트라 건물을 고려극장으로 사용하라는 승인을 내 주었다. 새로 극장이 들어설 건물은 알마티 시내 중심가의 500석 규모의 2층짜리 건물이다. 이런 탓에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고려극장이 어디냐고 물으면 대답하는 이가 얼마나 어떻게 알고 있는가에 따라 달라 지게 되는 이유다.

고려극장은 어느 시절, 어느 곳인지에 상관없이 소련 정부의 통제와 지원을 받았다. 문화예술활동이 개인의 창의와 감성을 표현하는 대상이 아니라 사회주의 이념과 체제 선전을 위해 충성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고 규정하는 공산주의 소련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고려극장의 역사는 고려인 한인 동포들이 소련이나 카자흐스탄 사회에 정착, 동화되는 과정을 상징하는 역사이기도 하다.

rsfnews@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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