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고려인 정착지 우슈토베... '잔치국수'를 끝으로『건국 70주년 2만리 역사기행』최종회
최초 고려인 정착지 우슈토베... '잔치국수'를 끝으로『건국 70주년 2만리 역사기행』최종회
  • 조희문 평론가
  • 승인 2018.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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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회

강제이주 한인들이 첫발 디딘 정착지 유슈토베를 끝으로 역사기행 2만리를 정리한다.

 

우슈토베 안내판
우슈토베 안내판

카자흐스탄에서의 첫날, 고려극장을 보았다고도 안보았다고도 할 수 없는 상태로 일정을 마친 일행은 다음날 연해주 최초의 고려인 정착지 우슈토베를 향해 출발했다. 알마티에서 버스로 6시간 정도가 걸리는 거리다. 러시아나 카자흐스탄이나 워낙 땅이 넓은 나라들이라 가까운 근처라 하여도 몇 시간 정도는 보통으로 여기는 듯 하다.

우슈토베 한곳을 방문하는데도 1박 2일의 일정을 잡았다. 우슈토베에 도착하기는 했지만, 처음으로 고려인들이 정착하였다는 장소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잡고 물어봐도 정확한 위치를 아는 이가 없다. 대신 어느 교회를 자꾸 알려 준다. 거기 가서 물어보라는 뜻인 듯 하다. 이리저리 방향을 몇 번 돌린 끝에 알마티 고려 선교회 건물 앞에 차가 멈추었다. 그 곳에선 선교 책임을 밑고 있는 박희진 선교사를 만났다.

알마티 고려문화원에서 우슈토베에 가서 꼭 만나야 할 사람이라고 일러준 그 분이다. 전화위복이라고나 해야 할까, 사람을 찾는 일도, 장소를 찾는 일도 한꺼번에 해결되었다. 미리 연락을 받은 터라 박선교사는 앞장 서 고려인 이주 현장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20여분을 달렸을까. 마을과 멀리 떨어진 공동묘지 옆에 이주 기념비가 서있었다. 그 곳의 지명은 바슈토베. 일행은 이주 기념비 앞에 제물을 차리고 위령 비나리를 올렸다. 박희진 선교사는 처음 이 곳을 찾은 이래 제물을 차리고 절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고 했다.

기념비 왼쪽의 표석에는 누구의 글씨인지 투박한 필체로 한인들이 이 곳에 처음 발을 디뎠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글씨는 단지 지난 날의 사실만을 전할 뿐인데도 글씨 쓴 사람의 한과 피눈물이 그대로 묻어나는 듯 그 자체로 절절했다.

기념비 뒤쪽 갈대밭 언저리에는, 최초 이주자들이 팠다는 움터가 서너 개가 유적처럼 남아있다. 폭은 2m 남짓, 깊은 곳이라야 어른 허벅지 정도의 깊이여서 언뜻 평범한 구덩이처럼 보이지만 그런 곳에 지붕을 덮고 사람이 살았다니 들짐승 처지와 다를 바 없었을 터이다.

강제 이주 한인들이 땅을 파고 살았던 움터
강제 이주 한인들이 땅을 파고 살았던 움터

이주민들의 정착 덕분인지 지금의 기념비 주변은 푸른 초목이 무성하다. 갈대가 자란다는 것은 주변에 그만큼 물이 흔하다는 표시다. 들판 가운데로 수로가 지나고, 각종 농작물을 재배하는 경작지가 이어진다. 이곳에서는 쌀, 감자, 양파 같은 곡물, 채소가 넉넉하고 목축도 성하다고 한다.

오가는 길에서 보더라도 들판과 소나 말, 양떼들이 여기저기 눈에 띤다. 돌아오는 도중에 잠시 소떼에 갇히기도 했다. 아침 나절, 목초지로 이동하는 중인지, 수십 마리 소떼가 산책하듯 도로를 어설렁 거리며 걸어간다. 그 옆에는 말을 탄 목동이 소떼를 이끌기는 한다.

하지만 소떼가 길거리를 활개 치며 걷는 것에는 별로 개의치 않는 듯하다. 소가 그리로 가겠다는데 난들 어쩌겠는가라는 행동이다. 가끔 차들이 지나가는데, 소떼를 치우라거나 길에 소떼가 들어오도록 목동은 뭐하고 있느냐며 짜증내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소떼나 목동이나 지나가는 차나 모두 그저 그런가보다 하는 표정들이다.

우슈토베 공동묘지에서 만난 한인 동포 엄학순의 추모 표지

기념비 맞은 편에는 공동묘지가 있다. 카자흐스탄의 묘지는 봉분을 하지 않는 대신 추모 표석을 세우는 것이 장의 방식인 듯 무덤마다 울타리를 치고, 표석을 세우기도 하고 사진을 붙여놓은 곳도 있다. 몇 군데를 살펴보니 한글 표지판도 띄엄띄엄 보인다. 무덤의 주인이 이주 첫 세대인지 그들의 후손인지를 헤아릴 수는 없지만, 금속 표지판이 짙게 녹슨 것으로 보아 수십년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다.

제정 러시아 시절부터 중앙아시아 일대를 개발하려는 시도는 여러 번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몇차례 이주 계획을 세우고 이주단을 모집했으나 가려는 사람이 적었고 정착에 성공하는 사례는 더욱 적었다.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채 중앙아시아 개발은 논의로만 그쳤다.

그 과정에서 한인 12가구가 이주단에 포함되어 우슈토베 지역에서의 농사 가능성 여부를 시험한 적이 있다고 한다. 여름이 짧긴 하지만 벼농사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고 전한다.

연해주 한인들의 강제 이주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 소련 정부의 내부 계획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나타난 조치였겠지만. 유독 한인들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한인들의 뛰어난 영농 능력도 계산에 넣은 것이 아닌가 싶다. 연해주에서 강제 이주당한 17만 명 중 3만2천 명 정도가 우슈토베 역에 내렸다고 하니 중앙아시아 ‘코리안로드’의 시발지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석양에 기우는 우슈토베 역 풍경
석양에 기우는 우슈토베 역 풍경

소련 정부의 계산이 무엇이었던 한인들은 수만리 먼 땅에 강제로 이주 당했고, 혹독한 추위와 배고픔을 견뎌야 했다. 그래도 한인들은 버려진 그 곳에서 새로운 삶을 일으켰다. 맨 몸으로 마주한 지독한 겨울 추위를 땅속에 움을 파고 갈대 이엉을 덮는 것으로 견뎌야했다.

그나마 구들(온돌)을 설치한 경우에는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한 가구들에서는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진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겨우 날이 풀린 뒤에는 땅을 일구어 농사를 지었다.

중앙아시아에서 벼농사, 배추, 양파 농사를 처음으로 지은 것은 바로 강제 이주당한 한인들이었다. 누구도 하기 어려운 기적 같은 생존이다.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일대에 흩어져 있는 고려인들이 바로 그들이다. 나라 잃은 백성들이 받은 극한의 유형이었지만, 그것을 견디며 이겨낸 과정은 위대한 승리의 드라마다.

피눈물의 고난을 견디며 새로운 반전을 이룬 당시 세대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지만, 그 강인한 힘을 이어받은 2세, 3세들 그리고 다시 그들의 후손인 4세 5세들이 그들의 존재를 증거하고 있다.

우슈토베 역 식당에서 만난 잔치국수
우슈토베 역 식당에서 만난 잔치국수
우슈토베 한인 이주지를 돌아보고 오는 길에 저녁은 우슈토베 역 안에 자리 잡은 식당에서 ‘잔치국수’를 먹었다. 박희진 선교사가 소개하기로는, 한인교포들이 조국 생각을 할 때마다 추석날 송편을 먹듯 먹는 메뉴라고 했다. 이름은 ‘잔치국수’였지만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진했다. 우리의 잔치국수가 가볍게 담백한 맛을 앞세우는데 비해 우슈토베의 잔치국수는 고기와 야채 고명이 훨씬 푸짐하고 국물맛도 짙게 우린 육수 같은 식감이 더 강했다. 푸짐한 ‘고기국수’라고 했다면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싶지만 한인동포들은 국수의 모양이 아니라 이름으로나마 향수를 먹고 싶은 것이 아니었을까는 생각이 들자 가슴 한 구석이 흔들린다.

조희문은 누구인가?

조희문은 좌파일색인 한국 영화계에서 거의 유일한 우파 영화 평론가(영화학 박사)다.

경인일보 문화부장을 거쳐

상명대 영화전공 교수,

인하대 영극영화과 교수,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

한국영화학회 회장 등 평생을 영화 관련 평론과 학술사업에 종사했다.

최근에는 좌파와의 역사문화전쟁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우슈토베로 가는 도중 들른 식당의 양꼬치 구이
우슈토베로 가는 도중 들른 식당의 양꼬치 구이
우슈토베 들판을 흐르는 수로
우슈토베 들판을 흐르는 수로

jayooilbo@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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