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남공작사』 북, 남로당과 무관한 남한 출신 인물 공작원으로 남파
『대남공작사』 북, 남로당과 무관한 남한 출신 인물 공작원으로 남파
  • 유진 북한문제 칼럼니스트
  • 승인 2018.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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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후반 북한 대남공작부서는 이미 파괴되거나 연계가 끊어졌던 당조직과 당원들을 수습하고 재연계하는 공작뿐만 아니라 기존 조직과는 전혀 무관한 새로운 지하당조직 즉 신조직을 구축하는 공작도 벌였다. 이러한 신조직 구축 공작은 연락부의 제2조직공작 부문에서 담당했다.

신조직을 만드는 공작은 주요 도시나 산업지대, 교통요충지대를 위시해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도시와 지역을 중심으로 거점조직을 구축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를 위해 남한에 연고가 있으면서도 남로당 조직과는 무관한 남한출신의 인물들을 공작원으로 선발하였다. 가급적 8.15 전후 입북한 남한출신으로 출신 지역이나 거주했던 지역에 인맥이 남아있는 인물들 가운데 북한에서 일정한 직책의 간부로 활동하고 있는 대상들 가운데 물색했다. 그리고 남로당 간부출신이라도 서울에서 중앙기관 간부로만 활동해 출신 지방은 물론 다른 지역에 노출이 없거나 아주 적은 간부라면 적격이었다.

이러한 대상들을 공작원으로 선발한 다음 6개월~1년 동안 초대소에 입소시켜 침투를 위한 훈련과 지하당조직 구축 방법 등 대남공작에 필요한 훈련 및 교육을 이수하도록 한 후 침투시켰다.

◇충청남도 아산 출신의 김종성

대표적인 신조직 구축 공작 사례로는 충청남도 아산 출신의 김종성의 경우를 들 수 있다.

김종성은 1930년대 초반에 북한지역인 함경북도 청진제철소에 취직해 노동을 하다 8.15해방을 맞이했다. 그래서 선반기술과 자동차운전, 선박수리 기술 등 여러 가지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8.15전까지 그는 명절 때마다 고향인 아산에 살고 있던 부모형제를 찾아 고향나들이를 했으며 8.15후에는 일찍 공산당에 들어가 평양학원과 보안간부학교를 졸업하고 38선 경비대 소대장과 중대장으로 복무했다.

전쟁 시에는 인민군 대대장으로 참전하여 전쟁 중에 연대장, 군사부사단장까지 승진했다가 1954년 군사관료주의자로 비판받고 제대되어 함경남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고 있었다.

이러한 김종성이 공작원으로 선발된 것은 그의 나이가 44세 때인 1955년 초였다. 그는 노동자 출신으로서 성질이 활달하고 배짱이 좋을 뿐만 아니라 군사지휘관을 오래 했기 때문에 사상이 투철하고 추진력과 실무능력도 탁월했다. 또 재남 연고관계도 좋아 공작원으로 선발되는데 유리했다.

남파공작원으로 선발된 김종성은 7~8개월 동안 대남침투와 신조직 구축 공작에 필요한 각종 훈련 및 교육을 받고 1955년 10월 충남 아산만 해안으로 침투하는데 성공했다.

◇영등포 철공소에 취직한 뒤 합법신분 얻어

전쟁 때 월남한 것으로 자신의 신분을 위장하고 아산과 서울에 있는 연고자들을 찾아간 김종성은 그들의 도움으로 영등포 철공소에 기술자로 취직했다. 그리고 시민증을 분실한 것으로 위장해 복덕방을 하는 지인을 내세워 관계자들에게 금품을 주고 정식으로 시민증도 발급받아 완전한 합법신분을 얻었다.

그리고 연고자와 합작으로 소규모 철공소를 경영하는데 까지 이르게 되었다. 한편 천주교 교인으로 위장해 성당과 종교단체에도 적극 참가하고 향우회, 종친회 모임에도 열성적으로 참여하여 주변 사람들과의 인맥관계를 넓혔다. 이 과정에 포섭 가능한 인물들을 발견하고 이들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등 공작이 순조롭게 진척되었다.

전형적인 북한 공작선 외형은 어선같지만 속도는 3배 빠르고 3~5미터의 파도도 견딘다.
전형적인 북한 공작선 외형은 어선같지만 속도는 3배 빠르고 3~5미터의 파도도 견딘다.

이렇게 되자 그는 어서 빨리 큰 성과를 올리고 북한으로 복귀해 연락부 간부들이 아니라 김일성 앞에서 큰 소리를 쳐보겠다는 공명심과 조급성이 앞서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한두 명도 아닌 5~6명과 한꺼번에 섣불리 정치적 관계를 형성하고 이들과 비밀조직을 구성하여 활동하던 중 노출되자 서울을 탈출해 부산으로 피신했다.

그리고 1960년 4.19직후 아산의 연고자를 내세워 소형어선을 구입해 그해 7월 월북하였으나 다시 임무를 받고 1961년 3월에 재침투하여 활동하다 검거되고 말았다.

yj@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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