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하와이의 이승만과 박용만

류석춘
류석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와이로 들어온 박용만과 이승만을 하와이 교민들은 열렬히 환영했다. 사실 두 사람은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그러나 각자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공부한 배경과 관심의 차이는 하와이 교포사회를 이끌어 갈 방향과 전략을 놓고 극심한 대립을 빚었다. 이승만의 실력양성과 박용만의 무장투쟁 노선갈등은 결국 하와이 교포사회에 엄청난 풍파를 불러왔다.

이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박용만이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이승만과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박용만(1881~1928)은 이승만보다 6살 아래로 철원 출신이다. 동경 유학을 잠시 다녀온 후 보안회(輔安會)의 일제 황무지 개척권 요구에 항거하는 운동에 가담한 이유로 투옥되어 이승만과 함께 감옥생활을 하다 먼저 출옥했다. 감옥에서 박용만은 이승만과 의형제를 맺었다.

1915년 ‘대조선국민군단’의 하와이 시가행진(출처: 독립기념관). 미국과 우호 관계였던 일본의 항의로 ‘대조선국민군단’은 1916년 10월 문을 닫아야 했다.
1915년 ‘대조선국민군단’의 하와이 시가행진(출처: 독립기념관). 미국과 우호 관계였던 일본의 항의로 ‘대조선국민군단’은 1916년 10월 문을 닫아야 했다.

이승만이 1910년 출판한 독립정신에는 박용만이 쓴 후서(後序)가 이승만의 서문(序文) 바로 다음에 나온다. 박용만이 이승만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고 또한 동시에 자신을 낮추고 있었는지는 이 후서에서 잘 드러난다 (우남이승만전집발간위원회, 2019, 독립정신연세대 대학출판문화원, pp. 21-22).

[이승만]는 하루아침에 이 글을 써서 먼저 옥중에 함께 있던 동지들인 정순만, 신흥우, 이동녕 등 여러분에게 보여주고, 다시 나에게 보내 비평하기를 청하였다. 나는 감히 그 일을 감당하지 못하고, 오직 노숙한 선배 이상재 씨에게 부탁하여 한번 비평을 듣고 다시 교정을 보았다... 어떤 사람이든지 이 글을 읽는 사람은 우선 이 글을 쓴 사람이 먼저 깨달은 자라는 것도 짐작하려니와 그 자신도 또한 응당 독립의 정신이 들고 독립하는 사람이 되어 장차 조선에 유익한 인재가 될 줄로 믿노라.”

박용만은 이승만이 감옥을 나와 미국으로 가기까지 잠시 몸담았던 전덕기의 상동청년학교에서도 같이 활동했다. ‘엡워쓰청년회서기로 활동하던 박용만은 이승만을 교장으로 추천했다. 이승만이 미국으로 떠난 후 박용만은 이승만의 독립정신친필원고를 가방에 넣고 또한 이승만의 아들 봉수(태산)의 손을 잡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 도착한 박용만은 봉수(태산)를 이승만이 있는 워싱턴까지 데려다줄 인편을 챙긴 후, 콜로라도 (Colorado) 주 덴버 (Denver) 에 가서 늦깎이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박용만은 1908년 네브라스카 대학 (University of Nebraska) 에 입학해 1912년 졸업하고 정치학 학사가 되었다. 대학에서 ROTC 과정을 이수하던 박용만은 1909년 헤이스팅스 (Hastings) 한인소년병학교’ (The Young Korean Military School) 를 세우고 여름방학을 이용해 30명 안팎의 생도를 교육했다.

1911년 네브라스카 대학을 잠시 휴학한 박용만은 1년간 샌프란시스코 신한민보주필로 활동하며 국민개병설책자도 출판했다. 박용만이 미국 네브라스카에서 활동하는 동안 이승만은 박용만을 세 번이나 방문했다. 1908년 여름 박용만이 주도한 애국동지대표회참석, 1910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리고 1912105인 사건 여파로 미국에서 정처 없는 도피생활 중, 이렇게 세 번이다. 마지막 만남에서는 하와이행을 함께 결의했다.

191212월 하와이에 도착한 박용만은 신한국보’ (19139월부터 국민보’) 주필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일제에 대한 군사적 투쟁을 강조한 박용만은 1913년 후반부터 호놀룰루 동북 방향 배후지에 대조선국민군단’ (The Korean Military Corporation) 이라는 부대를 창설하고 이어서 부속 병학교’ (The Korean Military Academy) 개교도 서둘렀다. 이민 오기 전 대한제국 군대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교민 124명을 훈련 대상으로 선발했다.

19148월 문을 연 병학교막사와 군문(軍門) 낙성식 행사에 초대받은 이승만은 믿음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야심차게 개교한 박용만의 산넘어 병학교는 그러나 1915년 후반을 넘어가면서 쇠퇴하기 시작해 191610월 폐교되고 말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가? 이 과정의 배후에는 이승만이 승리하고 박용만이 패배한 하와이 교민사회의 주도권 다툼이 있었다.

하와이 교민들은 학교를 세우고 잡지를 발행하는 이승만의 실력양성 노선과 군사학교를 운영해 무장투쟁을 하자는 박용만의 노선 사이를 오가며 각종 성금을 부담하고 있었다. 교민들의 경제적 상황에 비추어 작지 않은 부담이었다. 이런 조건에서 하와이 교민활동을 주도하며 박용만을 후원하던 대한인국민회 집행부 횡령 사건이 19151월 드러났다.

19152월호 태평양잡지에서 이승만은 박용만이 주도하는 대한인국민회를 맹비난하는 논설을 실었다. “국민회에 돈을 주어서 시루에 물 붓듯이 없애는 것보다 이승만에게 주어서 사업하는 것이 한인 전체에 유익이 될 것이다” (오정환, 2022, 세 번의 혁명과 이승만타임라인, p. 160). 이승만의 주장에 교민들이 대거 동조하기 시작했고, 물리적인 충돌과 소송 끝에 결국 이승만 지지파가 승리했다.

실의에 빠진 박용만을 이승만은 보듬었다. “나는 박용만 국민보 주필이 국민회 공금횡령과 관련이 없다고 믿는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사표를 낸 국민보 주필로 복직시켰다 (오정환, 같은 책, pp 162-163). 그러나 박용만은 이승만의 손길을 뿌리치고 1917년 상해로 떠나 7월 박은식, 신채호, 김규식 등과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하고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민족대회를 호소했다. 그러나 결국엔 실패해서 그해 겨울 하와이로 돌아왔다.

미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꿈꾼 박용만.
미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꿈꾼 박용만.

1918년 벽두 하와이에서는 다시 이승만이 장악한 국민회에 대한 박용만 계열의 대반격이 시작되었다. 횡령 등의 의혹 제기에 이승만은 박용만을 직접 거론하며 반론을 펼쳐 갈등은 더욱 증폭됐다. 물리적 충돌 끝에 박용만은 갈리히연합회라는 독립된 그러나 소수단체를 만들어 국민회를 이탈했다.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안창호마저 박용만을 비난했다. 이승만의 완승이었다.

하와이에서 이승만과 박용만의 갈등이 이승만의 완승으로 끝나는 배경에는 보다 큰 정치군사적 지형도 작용하고 있었다. “1818년 제정된 미국의 중립법은 미국과 평화 관계에 있는 외국 군주의 영토나 지배자를 목표로 그곳에서 수행하려는 어떠한 군사적 원정을 계획하거나 착수하거나 그 수단을 제공하는 자는 유죄이다라는 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정환, 2022, 같은 책, p. 156).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가 전시중립이었던 이승만은 중립법의 내용과 미국 내 무장 독립군 창설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 (1914~1918) 이 발발하자 일본은 즉각 영국과의 동맹을 근거로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러나 미국은 1차대전 초반에 중립을 표방하고 있었다. 미국의 참전 전까지 하와이에는 일본과 독일 두 나라 군함이 자유롭게 드나들고 있었다 (김명섭·박재원, 2021, “1차 세계대전 전후 하와이 대한인 독립운동: 이승만과 박용만을 중심으로국제정치논총614).

이 상황에서 국민회를 이끄는 박용만 계열의 한인들은 일본의 적 독일 군함이 들어오면 환영했고, 일본 군함이 들어오면 적대적 태도를 보였다. 일본 군함 이즈모(出雲) 호가 19149월 입항한다는 언론 보도를 보고 박용만의 병학교학생 일부가 폭탄을 이즈모호에 설치하려 한다는 소문마저 돌았다. 무장투쟁 노선의 위험성을 알고 있던 이승만이 이길 수밖에 없는 정치군사적 환경이 전개되고 있었다. 19174월 미국의 참전은 이승만의 완승에 마침표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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