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A 증언】“1970 당시 北미그기가 포항까지 비행해도 아무도 포착 못했다”下
【CIA 증언】“1970 당시 北미그기가 포항까지 비행해도 아무도 포착 못했다”下
  • 마이클 리 전CIA 대북전담요원
  • 승인 2018.09.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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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군의 전투기가 백주에 아무저항도 없이 대한민국의 포항까지 날아왔는데 우리 군대가 포착을 못했다."

"한국 중앙정보부에서 나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박순국 소좌는 북한공군 원산기지 소속, 소위 공화국 1급조종사였다. 그는 남한에 귀순할 생각을 해본 일이 없었다. 그가 타고 있던 MIG-15기에 결함이 발생하여 자기 비행기를 몰고 신의주 바로 밑에 있는 <양시 비행기 수리창>에 가서 수리를 했다.

그 당시 북한은 공군전투기의 엔진과 중요한 부품 외에 일반부속품은 자체생산이 가능하였고 모든 비행기의 수리를 이곳에서 하였다. 박순국은 수리를 끝낸 자기의 비행기를 몰고 원산으로 가야하는데 그때 중대한 실수를 범하였다.

조종사는 비행기를 타면 무조건 산소마스크를 써야 하는데, 그가 생각하기를 자기는 공화국 1급조종사이며 원산까지 가는데 불과 15분도 안 걸리므로 산소마스크가 필요 없다고 자만한 것이다.

그러나 비행기가 일단 고공에 올라간 후에 산소결핍으로 조종사 박순국이 방향 감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는 분명히 원산을 향하여 가고 있다고 판단했지만 비행기는 백주에 중부전선을 지나서 남한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사실은 방향감 상실로 남한으로 넘어와

그러나 지상으로부터 아무런 저항이 없었기 때문에 아직도 북한 상공이라고 생각하고 기수를 동해 쪽으로 돌렸으나 나타난 곳이 포항이었다. 아차 비행착오다 당황하고 급히 북상하여 원산 명사십리 해수욕장으로 보이는 백사장에 불시착 하였는데 사실은 그곳이 강릉 해수욕장 이었던 것이다.

비행기에서 내려오니 해수욕장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이 몰려오는데 그들의 복장이 남한복장이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박순국은 자기가 남한 땅에 불시착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까지 대한민국의 공군이나 지상군이나 경찰의 저항이 없었다. 그러고 나서 박순국은 곧바로 서울로 압송되었고 그의 신변을 중앙정보부가 관리하고 있는 동안 완강하게 판문점을 통하여 북으로 송환해달라고 주장했다.

내가 박순국 면담을 오후 1시에 시작하였는데 오후 3시 반 쯤 되었을 때 중앙정보부 요원 한사람이 들어와 오늘의 면담은 여기서 끝내야 한다면서 그를 데리고 나갔고, 바로 뒤에 대공 합심반장 성00 중령이 들어와 아주 경색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 선생, 오늘 면담한 녹음테이프와 노트를 내가 압수합니다. 당신은 미국정부소속의 심문관이지만 신분은 대한민국 국민이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법에 속해있고 대한민국정부의 시책과 기밀을 지키고 보호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제 부대에 돌아가서도 오늘 면담한 내용을 절대로 보고하거나 브리핑해서도 아니 됩니다. 만일 당신이 이 부탁을 어기면 우리정부는 당신에 대하여 엄중한 보안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이미 각오한바가 있어 아무런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저 사람들이 나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면담 노트와 녹음테이프 압수당해

부대에 돌아와 보니 미8군 G-2에서 나온 장교들과 미502 군사정보단 참모들이 나의 귀대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의 녹음테이프와 면담노트가 압수당한 이야기와 성00 중령의 협박에 대해서 말하고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보았다.

그때 미502 군사정보단 단장 마틴 대령이, “자네의 신변안전에 대해서는 우리가 책임을 지겠으니 오늘 면담한 내용을 소상히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나는 상당히 불안했지만, 내가 어떻게 박순국을 접근했으며 그가 숨김없이 진술한 내용을 모두 구두로 보고하였다.

그리고 나는 향후 1주일간 집으로 퇴근을 못하고 영내에서 기거했다. 그때 모든 문제의 핵심은 적군의 전투기가 백주에 아무저항도 없이 대한민국의 포항까지 날아왔는데 우리 군대가 포착을 못했고 누가 그에 대한 책임을 질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나의 보고를 받은 미군 측에서는 한국정부의 입장과 정치적 민감성을 고려하여 UN군사령부 참모장 겸 주한 미8군사령부 참모장인 <스미스> 중장이 중앙정보부 이후락 부장을 만나서 한미양국의 입장을 조율하고 모든 사실을 군사기밀로 처리할 것을 합의한 후 박순국을 면담한 미국 측 심문관인 나에 대한 보안조치를 불문에 부치기로 약속을 받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나는 1주일 만에 퇴근하여 집에 돌아갔다.

제459차 군사 정전회담에서 서로 악수 하고 있는 유엔 측 대표와 북한측 최의웅 소장
제459차 군사 정전회담에서 서로 악수 하고 있는 유엔 측 대표와 북한측 최의웅 소장

그 후 북한에서는 끈질기게 박순국의 송환을 요구해왔다. 1971년 6월 2일에 군사정전위원회 UN측 수석대표 <로저스> 소장이 판문점에서, 국제적십자사의 입회하에 박순국이 거주지선택의 자유원칙에 따라, 그리고 인도주의 원칙에 따라, 아무런 압력 없이 남한에 거주할 것을 결심하였다고 북측에 통보했다.

제442차 군사정전위 회담을 취재 나온 미국 여기자에게 담뱃불을 붙여 주는 북한 장교
제442차 군사정전위 회담을 취재 나온 미국 여기자에게 담뱃불을 붙여 주는 북한 장교

그리고 1971년 6월 10일에는 공군본부에서 내외귀빈들의 축하를 받으면서 박순국이 대한민국 공군소령으로 임관되었고 김두만 공군참모총장이 그에게 계급장을 달아주었다. 그 자리에서 답례사로 박순국은 반공투사로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했다.

뒤늦게나마 역사의 진실을 깨달은 박순국은 최선을 다하여 복무하였고 한미양국 정보기관에 지대한 협조를 제공했다. 결혼을 하여 안정적인 가정을 이루었고 두 딸을 보았으며 공군대령이 되기까지 공군본부에서 근무하다가 1976년에 암으로 사망했다.

mlee-cia@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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