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1차대전 종전과 위임통치청원

류석춘
류석춘

1918년 11월 독일이 미··불 연합군과 휴전협정에 조인하면서 1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렸다. 다음 해인 19191월 파리에서 전후처리를 위한 강화회의 일정이 잡혔다. 전쟁의 책임, 그에 따른 영토조정, 그리고 새로운 평화체제구축 등을 논의하고 결정하는 자리였다. 물론 승전국이 아닌 패전국을 대상으로 한 국제질서의 재편이었지만, 미주의 한인 독립운동 단체들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당시 미국에 살고 있던 소수민족들은 1차대전 종전을 전후해 두 번의 소약국동맹회의를 열면서 자신들의 입장을 새로운 국제질서에 반영시키고자 노력했다. 아이리시(Irish), 체코인(Czechs) 등 미국에 이민 온 유럽의 소수민족들이 전후 유럽에 자신들의 국가를 세우기 위한 노력이었지만, 일본의 식민통치를 겪고 있는 한인들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문제였다.

1차대전이 끝나고 파리강화회의를 통해 확정된 유럽의 새 국경 지도(1923). 붉은색 글자 국가들이 새로 독립한 국가들이다. 패전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에서 체코 등 독립국들이 생겨났고, 역시 패전국 ‘오토만’ 제국 영토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위임통치하는 국가들이 만들어졌다. 패전국 ‘독일’ 제국은 영토가 대폭 축소되었다. ‘러시아’ 제국은 승전국 측에 속해 있었지만 1917년 볼세비키 혁명으로 제국이 해체되면서 전쟁을 포기하여 영토가 대폭 축소되었다.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가 축소된 러시아 제국 영토에서 독립했다.

소약국동맹회의 첫 번째 회의가 191710월 뉴욕에서 열렸다.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가 박용만을 이 회의에 파견했다. 두 번째 회의는 191812월 역시 뉴욕에서 열렸다. 이번에는 해외 한인을 총괄하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가 이승만·민찬호·정한경을 대표로 파견했다. 동시에 안창호는 소약국동맹회의가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는 경우, 한인 대표자 1명도 그들과 함께 간다는 결정도 했다.

본토에 있던 민찬호·정한경은 날짜를 맞출 수 있었다. 그러나 안창호의 통보를 받은 하와이의 이승만이 본토로 가기 위해서는 일본 영사관이 발급하는 여권을 받아야 했다. 일본을 인정하지 않던 이승만은 이를 우회하기 위해 미 국무부의 특별허가를 얻었다. 이런 절차 때문에 이승만은 191916일이 되어서야 하와이를 출발할 수 있었다.

이승만의 출발 전 이미 종료된 소약국동맹회의는 약소민족의 독립청원서를 파리로 보내 출석권을 주면 강화회의에 간다는 하나 마나 한 결의를 했을 뿐이었다. 더구나 파리 회의를 주도하는 승전국들이 자신의 식민지 대표를 회의에 부를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6년 만에 하와이를 떠나 본토로 가는 이승만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일본이 승전국의 일원이었기 때문이다. 일본과 우호 관계에 있는 미국이 일본의 식민지 대표를 파리강화회의 정식 멤버로 인정해주기는커녕, 파리로 가는 여권조차 발급해주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러나 동시에 프린스턴 대학에서 맺은 미국 대통령 윌슨과의 특별한 관계를 생각하면 낙관적인 기대를 버릴 수도 없었다.

1차대전이 막바지로 치달을 무렵 전후처리를 위한 국제정치 역학은 이미 바삐 돌아가고 있었다. 미국 대통령 윌슨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대략 1년 전인 19181월 미 의회에서 세계평화를 위한 14개 조항을 제시했다. 영토적 야심이 없는 해양무역 국가 미국이 식민지 종주국 중심으로 구축된 경제블록을 해체하고 국제통상을 확대하는 새로운 국제질서를 만들자는 제안이었다. 이를 위한 명분으로 민족자결주의원칙이 제시되었다(Erez Manela, 2007, The Wilsonian Moment: Self Determination and the International Origins of Anticolonial Nationalism, Oxford University Press).

식민지배를 당하고 있던 약소민족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그러나 1차대전 승리를 내다보고 있던 식민지 종주국들 특히 영국과 프랑스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패전국 식민지를 접수할 속셈을 이미 마쳐 놓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윌슨은 민족자결을 구현하는 구체적 방안까지 제시했다. ‘국제연맹에 의한 한시적 위임통치였다.

윌슨은 패전국 독일·오스트리아·터키의 영토와 식민지 그리고 1917년 혁명 뒤처리로 전쟁에서 갑자기 빠진 러시아 영토에서 분리할 지역을 국제연맹이나 다른 나라들에 맡겨 한시적으로 통치한 후 독립시키자는 방안을 제시했다. 윌슨의 구상은 실현 가능성이 없는 승전국 식민지는 아예 대상에 포함시키지도 않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윌슨의 구상은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승전국 5개국 즉 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일본이 중심이 된 파리강화회의에서 윌슨의 구상은 결국 일부만 수용되었다. 우선, ‘국제연맹이라는 평화유지를 위한 국제기구를 만들기로 합의했다. 다음, 위임통치 대상 지역을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분리해서 다루기로 했다.

정한경(Henry Chung De Young, 1890~1985). 1904년 14살의 나이로 미국에 건너 가, 네브라시카(Nebraska) 커니(Kearney)에서 초중고를 마치고, 네브라스카 대학(University of Nebraska)에서 학사 및 석사를 마쳤다. 아메리칸 대학(American University)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918년부터 노스웨스턴 대학(Northwestern University) 교수로 일했다. 한인 2호 박사 정한경은 한인 1호 박사 이승만을 도우며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에 기여했다.
정한경(Henry Chung De Young, 1890~1985). 1904년 14살의 나이로 미국에 건너 가, 네브라시카(Nebraska) 커니(Kearney)에서 초중고를 마치고, 네브라스카 대학(University of Nebraska)에서 학사 및 석사를 마쳤다. 아메리칸 대학(American University)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918년부터 노스웨스턴 대학(Northwestern University) 교수로 일했다. 한인 2호 박사 정한경은 한인 1호 박사 이승만을 도우며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에 기여했다.

가령 터키(오스만제국) 에서 분리되는 이라크·팔레스타인·요르단은 영국이, 시리아·레바논은 프랑스가 각각 후견국이 되어 위임통치하는 방안이 채택되었다. 한편, 독일의 해외 식민지는 승전국의 식민지로 재분할되었다. 또한, 러시아가 차지하고 있던 지역에는 5개의 독립 국가 즉 핀란드·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폴란드가 들어섰다. 이에 따라 등장한 새로운 유럽의 국경을 보여주는 지도가 위 지도다.

이승만이 본토로 가는 배를 탄 시점은 바로 국제정치의 역학이 이런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던 때였다. 샌프란시스코, LA, 시카고, 디트로이트, 뉴욕을 거친 이승만은 워싱톤에서 이미 활동을 시작한 민찬호·정한경 및 서재필과 연락이 닿아 마침내 필라델피아에서 넷이 함께 만날 수 있었다. 정한경은 일본의 방해로 여권을 발급받을 수 없음을 한탄했다.

그러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던 이승만은 차선책으로 미국 대통령 윌슨을 통해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를 준비하자고 제안했다. 당시 건강이 좋지 않던 이승만은 아메리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노스웨스턴 대학 교수로 재직하던 정한경으로 하여금 초안을 준비하도록 했다. 준비된 초안을 병상에서 다듬은 이승만은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의 동의를 얻어 1919225일 청원서에 서명하고 33일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제출했다.

민찬호(1877~1954)는 서울서 태어나 1894년 배재학당에 입학했고 1905년 미국 하와이 감리교회 목회자로 파송되었다. 1909년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 두 지역의 국민회 창립에 헌신하였으며, 1913년 안창호를 도와 흥사단 이사장을 맡았다. 1919년부터 호놀룰루 한인기독학원 학감 및 한인기독교회 담임목사를 역임하면서 이승만을 도와 1921년 대한인동지회 창립에 기여했다. 1938년부터는 한길수를 돕기도 했다.
민찬호(1877~1954)는 서울서 태어나 1894년 배재학당에 입학했고 1905년 미국 하와이 감리교회 목회자로 파송되었다. 1909년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 두 지역의 국민회 창립에 헌신하였으며, 1913년 안창호를 도와 흥사단 이사장을 맡았다. 1919년부터 호놀룰루 한인기독학원 학감 및 한인기독교회 담임목사를 역임하면서 이승만을 도와 1921년 대한인동지회 창립에 기여했다. 1938년부터는 한길수를 돕기도 했다.

'장차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다는 조건 하에 당분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받도록 해 달라는 요지의 내용을 담은 위임통치 청원서를 제출받은 윌슨은 그것을 파리강화회의에 회부하지도 않았다. 훗날 신채호 등 이승만 반대파들이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 먹었지만, 이승만은 있지도 않은 나라를 팔아먹었다고 공격한 위임통치안은 이렇게 만들어졌고 또한 미국 대통령 윌슨에 의해 무시당했다.

그러나 윌슨이 파리강화회의에서 제안한 방식에 따라 한국을 일본으로부터 분리해 일정한 기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하에 두어 달라는 이 제안은 당시의 국제정세를 고려하면 매우 설득력 있는 제안이었다. 중국 상해에서 신한청년단 대표로 파리에 파견된 김규식도 거의 같은 제안을 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오영섭, 2012, ‘대한민국 임시정부 위임통치 청원논쟁한국독립운동사연구41).

그러나 19193.1운동 이후 위임통치 청원에 쏟아진 비난은 오직 이승만에게만 집중되었다. 같은 제안을 한 김규식은 물론, 이승만의 제안을 승인해 준 안창호에 대한 비난은 찾아볼 수 없었다. 왜 이승만만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난도질을 했는지 앞으로 이어지는 글에서 답을 찾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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