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참외를 봤다
 

변산반도 위도 선착장 배에서 내리다가 봤다. 한 사내가 든 짐이 유독 눈길을 끌었다. 피피 끈으로 묶은 마분지 박스에 커다랗게 찍힌 ‘성주참외’ 한글 도안이 그랬다. 가득 담긴 참외가 당장 투시처럼 옹기종기 떠올랐다. 생산지 표시가 또 ‘초전면’으로 돼 있는 게 아닌가. 더욱 반가웠다.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이 여기서 어디냐. 전라도, 서해 멀리 흘러들어와 내 고향땅에서 난 참외를 보다니. 좀 전의 저 뭍, 격포항에서 나랑 한배를 탔던 거다. 단박, 이 섬하고 뭔 한 촌수 생긴 것 같았다. 나는 금세 금쪽같은 애착이 갔다. 누구네 농사일까. 혹시 동장 형님? 배다리들 용수 형님? 친구 전병규? 문상곤 씨? 미처 생산자 이름은 못 봤다. 사내는 어느새 포구 마을 골목길로 뒤뚱뒤뚱 접어들고 있었다. 나는 문득 속으로 "잘 살아라" 뜬금없이 뇌까리고, 혼자 씨익 웃었다. 이 어인 의인(擬人)? 섬을 뜰 때 배 뜰 때 노오란, 향기 달콤한, 엉덩이가 어여쁜 그런 식별도 있었다.

문인수(1945~2021)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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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에 오른 노란 참외가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 6월에 나오는 참외는 비닐하우스 참외다. 노지 참외는 7월 하순부터 나온다. 참외는 명실공히 한국인의 과일로 그중 성주 것이 으뜸이다.

시인은 ‘변산반도 위도 선착장 배에서’ 참외박스를 보고 감격한다. 보통 참외였더라면 안 그랬을 터인데 포장박스에 ‘성주참외’라는 문구가 뚜렷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곳이 변산반도 앞바다에 있는 위도가 아니었더라면 참외가 그처럼 반갑지는 않았을 것이다. 위도는 낚시꾼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섬인데 낚시와 거리가 먼 시인이 그곳엔 뭐하러 갔던 걸까.

만약 시인이 낚시를 좋아했다면 생전에 낚시에 관한 시를 최소한 한두 편 정도는 썼을 것인데, 작품 전체를 통틀어 낚시에 관한 시는 없다. 그러고 보니 시인은 경북 성주를 벗어나지 않았던 향토시인이었다. 이런 것만으로는 위도에서 우연히 참외박스를 보고 감격해하는 시인을 설명하기에 부족하다.

시인이 타지에서 성주참외를 보고 반가워하는 장면은 마치 오랫동안 해외를 떠돌다 우연히 한국말을 들은 사람 같다. 위도는 전라북도에서 가장 큰 섬으로 모양새가 고슴도치를 닮았다고 해서 위도(蝟島)라 불린다. 경상북도 성주와 전라북도 위도의 거리가 그다지 먼 거리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교통이 발달한 시대에 물리적 거리로는 그럴지 모른다.

하지만 고향을 떠난 적 없던 시인에게 위도는 해외만큼이나 멀고 낯설었을 터. 중요한 건 물리적 거리가 아니라 심리적 거리다. 물설고 낯설은 위도에서 성주참외를 본 시인은 참외농사를 지으며 사는 지인들을 떠올린다. 뒤이어 또 한 사람 떠올린다. ‘향기 달콤한, 엉덩이가 어여쁜’ 사람. 이런 표현을 두고 누가 외설스럽다 할까. 시인은 이 작품으로 제6회 미당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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